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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래하는 짱쌤 Dec 10. 2024

우리 아이와의 소통이 왜 어렵죠?

내 아이와 소통이 어려운 이유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서 가수 S가 나와 고민을 상담했다. 

‘어릴 적부터 타인에게 선의를 베풀었는데 오히려 오해를 받고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친구하고 쇼핑을 갔다가 친구도 사주려고 “이거 너한테 잘 어울리겠다. 너도 사!!”라고 말했는데 친구가 기분 나빠했다는 것이다. 오은영 박사는 그 이유를 가수 S의 ‘일방적인 소통 방식’때문이라고 했다. 일방적인 소통방식은 어릴 적 부모와의 의사소통 방식과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가수 S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다정한 소통의 기억은 별로 없고 통보와 명령 위주의 일방적 소통 방식을 고수하는 분들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로 인해 어릴 적에 부모에게 사랑받고 있지 않다고 느꼈으며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가수 S는 성장하여 부모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배운 말들을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쏟아내며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내 어릴 적 상황도 비숫했다. 

부모와 긍정적인 감정의 교류와 경험이 부족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감정의 교류와 소통이 쉽지 않았다. 대화를 할 때 여러 가지 이유로 자주 평정심을 잃었다. 아이와의 소통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가수 S의 부모처럼 과정의 설명 없이 결과만을 말했다.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무언가 빨리 알려줘야 하는 압박감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의 감정이나 마음의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도 나의 부모에게 공감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아이의 마음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한참 부족했다. 

     

또한 엄마와의 관계에서 눈치를 많이 보았다. 

어린 나이에도 ‘이 말을 하면 좋아하실까? 싫어 하실까?’를 마음속으로 따져서  엄마가 좋아하는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말을 가려 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영화보는 것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장면은 가족들과 모여 이야기 나누는 화목한 시간이었다. 부모와 자녀들이 둘러앉아 간식과 차를 마시며 하루에 있었던 일을 서로 말하며 웃음이 떠나질 않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영화에서 보는 엄마는 편안하고 즐거운 대화 시간이 되도록 아이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이해심 많은 모습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엄마의 모습처럼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어야지 야무지게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아이와 마주 앉으면 대화보다 행동이 먼저 보였다. 좋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먼저 지적을 하고 꾸중을 했다. 그러다 보니 식사나 가족이 모이는 시간이 잔소리의 장이 되었고 모두에게 즐겁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꼭 무슨 정답을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아이와 마주 앉았을 때는 무언가 가르쳐 주고 해결해 줘야 될 것 같았다. 아이와의 침묵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아이와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주는지 몰랐다.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는데 마음과 다르게 늘 화를 내고 잔소리를 했다. 도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첫째나의 부모와의 긍정적인 소통의 경험이 부족했다

나의 부모님은 30년대 빈곤국에서 태어나 어렵고 힘겹게 살아오신 분들이다. 그 시절은 먹고 사는 문제가 절실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시절이었다. 일한 만큼 댓가를 얻었기에 아침부터 새벽까지 일하며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자신을 희생 해온 분들이다. 덕분에 우리나라 근대화 산업을 일으켜 세운 역군이었다.      

그 당시는 노동력이 재산이었기에 ‘스스로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말로 자녀를 많이 낳던 시절이었다.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홀로 집을 떠나 교사가 된 9남매 장남인 아버지와 8남매 막내인 엄마가 만나 부부가 되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버지는 따뜻하시고 도전적인 분이셨다. 엄마는 여자라서 배우지 못한 한을 자녀의 교육에 쏟아부었다. 베이비붐 마지막 해에 태어난 나는 세 명의 동생들이 있었다.     

부모님은 자신들이 경험하고 체득한 방식인 ‘노력하면 안되는 일 없다’는 신념으로 우리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공부에 대한 갈망이 많은 엄마의 뜻에 따라 열심히 공부를 했고 틈틈이 집안일도 도와야 했다. 교사인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경제적인 어려운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던 나는 평범한 머리로 외우고 또 외우는 방법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동생들이 많았던 나는 힘들어도 내색을 못했다. 꿋꿋하게 내 일을 잘 해냄으로서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것이 맏이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늘 ‘공부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나에게 하시는 담굼질의 대부분은 꾸중, 협박, 비난, 악에 바친 욕, 등짝 스매싱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 부모님들의 육아 방식이었다.     

자라면서 부정적인 소통 경험이 더 많았다. 

대화가 아닌 엄마의 일방적인 훈계였지만 하면 할수록 감정이 상하고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다. 부정적인 소통의 기억으로 편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늘 엄마의 감정과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자존감이 바닥이었다. 고민과 어려운 일이 있어도 말도 못하고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며 성장했다. 엄마에게 “잘했다”고 듣는 칭찬과 격려가 그리웠다.        

나도 은연중에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해주기를 바랬다. 

무엇보다도 공부를 잘해야 기회가 많아지고 직업에 대한 선택의 폭이 커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면서 성적이나 어떤 결과가 기대 이상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 나 역시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그래. 좀 더 노력을 해봐.”라며 아이들을 밀어붙였다. “도대체 뭐가 되려고 그래?”라며 아이들이 한마디도 못하게 했다. 


둘째나의 감정을 이해받아 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에 우물이 있었다. 마중물을 붓고 펌프질을 하면 물이 나왔는데 어느 날 엄마가 일하시는 동네 우물가에 갔다. 갑자기 엄마가 “너도 펌프질을 한번 해봐. ○○는 잘하던데”라고 말하셨다. 펌프질을 해보았지만 처음하는 일이고 잘 되지 않았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엄마는 화를 내며 “아니 그것도 못해?”큰소리를 치며 야단을 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너무 창피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이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먼저 해본다고 한 것도 아니고 “○○는 잘하던데”라고 비교하면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어린아이가 하기에는 펌프질이 힘이 들었고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그런데 못한다고 사람들 많은 데서 오히려 혼이 났다. 엄마는 늘 ‘누구보다 잘하는가?’의 비교가 기준이었다.      

나도 아이들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에 서툴렀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질수록 간섭도 심해졌다. 내가 경험한 것이 최고인 것처럼 나의 잣대로 아이들을 판단하고 양육하였다. 내가 그토록 부모에게서 힘들고 나의 감정을 위로받지 못해 숨이 막혔던 부분을 나 역시 아이들에게 요구했다. 아이들이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결국은 지적질이 되고 간섭이 되었다.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막연히 경험이 많으니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정서를 자주 경험하는 아이들은 부모와 대화 자체를 일방적으로 듣게 되는 ‘잔소리’ ‘피곤한 일’ ‘피하고 싶은 일’로 인식한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들에게 힘이 되지 못했고 커가면서 속 깊은 대화보다 수박 겉핡기식의 일상적인 대화만이 간간이 이어졌다.      


셋째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존중을 받은 경험이 적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가족관계에서 상처를 더 많이 입는다. 가족이기에 함부로 대하고 예의도 차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족관계에서 받은 비난, 천대, 경멸, 추궁, 지시, 억압 등의 언어폭력 등은 아이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불안과 상처는 낮은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존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을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아이는 내가 배 아파 낳았다고 해서 내 소유물이 아니다. 남편과 나를 닮았다고는 하나 성격과 기질이 전혀 다르다. 아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는 생각과 욕구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리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통제하려고 한다.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지시하거나 통제하는 행동을 교육이라 착각한다. 부모는 아이들이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너무 불안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화가 나고 심한 말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부모들도 그들의 부모에게서 자신들의 감정을 이해받지 못했다. 존중받지도 못했고 긍정적인 소통의 경험이 부족하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어도 자녀와의 소통이 어렵기만 하다. 부모도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고 소통을 배운 적도 없다. 그냥 부모에게서 배운대로 습관적으로 소통을 한다. 그 습관이 나의 소통의 방식이 된 것이다.      

내가 부모에게서 존중없이 자연스럽게 습득한 비난과 지시, 통제의 소통법이 그대로 아이에게 대물림 되었다.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에게 습득된 부모님ㅣ다 의 가치관, 정서, 행동, 소통방식, 언어 습관, 사람을 대하는 자세 등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배운 나의 부정적 소통 방법이 그대로 대물림 되어 사랑하는 자녀가 어렵고 힘들다면 부모로서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약자’라고 표현하였다.

아이들 대다수는 어린 시절에 양육자인 부모의 가르침을 검증 없이 받아들인다. 아이들에게 부모란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을 다른 사람보다 더 소중한 사람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과거 소통의 결핍과 상처받은 나를 먼저 돌아보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위로해 보자. 대물림된 나의 잘못된 소통법을 돌아보고 그 상처를 끊어내자.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자녀와의 소통하는 법을 제대로 배워서 적용해보면 어떨까? 

그렇게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보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결국은 부모의 말이 전부다, 한선희, 미다스북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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