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책(12) 김상욱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솔직히 말해서 글 내용 중 84% 정도는 이해 못 했다. 그럼에도 정독, 완독을 했다는 건 어려울 뿐 재미없진 않게 이야기해 준 작가의 능력 덕이다.
나는 작가의 전작인 <떨림과 울림>을 기대하며 펼쳤고 그 기대는 글 중반 넘어서까지 말라갔다. 하하...
결국 물리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는 필연의 우주에서 너를 만난 이 사건은 내가 아는 유일한 우연이다. 이렇게 너와의 만남은 아무 의미 없는 필연의 우주에 거대한 의미를 만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자의 사랑이다.
김상욱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중에서
말라버린 기대가 다시금 촉촉해지게 한, 국지성 호우 같은 한 줄이다. 애초에 내가 웃긴 거였다. 이런 글귀를 찾아 떠돌면서 잘도 물리학자의 책을 집어 들었겠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물리학자는, 적어도 내가 보고 생각하는 물리학자 김상욱은 결정적인 순간에 모네가 그린 그림 같은 소릴 한다. 실제 하든 안 하든 내 눈엔 이렇게 보였고 그렇게 느꼈다고!
악착같이 감상과 감성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탁 풀려버렸다. 그는 '인간이라 해서 질소, 수소 등 원자로 이루어진 만물 구성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다만 그 배열이 다를 뿐'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 그와 나는 종이 다르다. 과학을 전공하고 카이스트를 졸업해 시를 꾸준히 쓰는 시인, 연구원으로 일하다 배운 적 없는 성악에 세상 놀랄 재능을 보이며 나타난 가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을 우연은 조금도 없는 과학적 필연의 결과 라면서도 사랑은 우연이고 우연이라서 사랑이라 하는 물리학자. 이런 인간들은 정말이지 이 차원에 불시착한 이상 세계의 존재가 아닐까.
국어, 영어, 사회로 좋은 점수 받아놓고 수학, 과학으로 열심히 말아 꼭꼭 씹어 먹었던 태생적 문과 인간. 나는 왜 과학서에 닳지 않는 흥미를 가질까. 서점에 가면 과학계열 서가를 제법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내가 매번 낯설고 신기하다. 그저 지적 허영심일까. 이것 보라고, 난 방금 문학동네의 시집을 하나 선택하고 민음사의 고전 문학 서가를 지나 이곳으로 왔어. 진정 지식을 탐구하려면 경계가 없어야 해!
개뿔.
책에 있어서만큼은 편식하는 버릇이 여든까지 가리라 단언한다. 정말 다양하게 별의별 걸 다 읽는구나 싶겠지만 고집스럽게 안 들여다보는 장르가 있고 시큰둥하고 마는 작가와 스테디셀러가 있다. 심지어는 표지로도 책을 판단한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된다는 말이 영어로는 돈 저지드 어 북 바이 커버라지. 그 말에 반하는 사람이 바로 나, 난 커버로 북을 저지드하는 사람.
이런 내가 고르고 골라 정하는 맞춤 식단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같은 책은 로제떡볶이, 막걸리로 탄 하이볼, 차돌마라짬뽕탕 같은 거다. 대부분이 물리학자가 쓴 이 책을 과학서로 분류하고 (다 읽고 나서도) 판단하겠으나 나에게 이 책은 하나의 분야로 분리할 수 없는 인문서와 과학서 사이다.
우리가 죽으면 원자로 산산이 나뉘어져 나무가 될 수도 있고 산이 될 수도 있다. '나'라는 원자들의 '집합'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나를 이루던 원자들은 다른 '집합'의 부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주의 일부가 되어 영원불멸하다.
김상욱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중에서
이 책이 내게 알려주려 하고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알게 한 것은 과학이 맞겠으나 그것들이 만들어낸 내 사유의 방 속 오브제는 모두 '인간(혹은 생물)'이다. 나누고 나누다 보면 그저 원자인 우리, 특수하지 않은 우리, 특수하지 않은데 특이하게 존재하니 특별하다 할 수 있는 우리.
작가를 이룬 원자나 나를 이룬 원자나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어느 한 명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이라는 윤동주스럽고 다윈적인 책을 쓰고 있고, 어느 한 명은 그 윤동주스럽고 다윈적인 책을 읽고서 지 같은 감상문을 쓰고 있다. 특수하지 않은 조건에서 특이를 만들어내는 우리는 모두가 아주 다르고, 아주 다르나 영 틀림은 없기에 특별하다.
윤동주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어머니를 헤며 시를 썼던 것과 다윈이 인간이란 신의 선택으로 빚어져 만들어진 것이 아닐 수 있다며 깊이 골몰한 것은, 그 고뇌와 사유를 나누고 나누고 쪼개고 쪼개면 결국 똑같다. 인간이 나누고 쪼개면 똑같은 원자인 것처럼 말이다. 문학이든 과학이든 무릎을 탁 치는 손보다 빠르게 마음을 꾹 누르고 가는 문장을 읽을 때마다, 이런 책을 쓰고야 만 인간에게 감탄하고 감동한다. 도대체가 당신은. 도대체가 이 종은.
작가가 의도한 것과 별개로 나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서 인간에게 감탄한다. 필연을 분석하고 우연을 깨닫고 그것을 글로 써낸 인간을. 우주, 좌표도 없는 곳을 둥둥 떠다녔을 그것을 어디에도 없으나 어디에나 있게끔 써내고야 만 인간.
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을 읽고 쓴 이 감상문은 기원의 종이라 이름 짓고 싶다. 이 감상은 곧, 모든 기원이 기원임을 알고 알린 하나의 종에 대한 감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