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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프피 Jul 23. 2024

망할 세상, 내 꿈은 부처야

태생 INFP의 혼자 사는 이야기_2

태몽은 엄마 손으로 떨어진 빛, 그 안에 나타난 작은 금불상이다. 그래서 내 오른쪽 팔뚝에는 연꽃 속 부처가 그려져 있다. 누가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없는데, 굳이 따지자면 불교”라는 요상한 답하던 시간을 지나 지금은 명확하게 불교라고 답한다. 철학에 한창 관심을 가진 때에 읽었던 <스무 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와 <붓다의 치명적인 농담>을 지나 지금의 나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읽는다. 그리고 망할 세상이 나까지 망하게 하려고 몰아세울 때나, 나와 똑 닮은 모습을 한 중생들로 인해 분노가 고개를 들 때는 이 주문을 외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 사바하


보이는 세상을 넘어 무한한 깨달음의 곳으로 넘어가고픈 마음을 담은 주문. 물론 알고 있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조차 집착이며 그것이 덕지덕지 붙은 무거운 몸으로는 그저 이곳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부처가 아닌 나에게는 그것이 최선이다.





하루에도 네댓 번은 실감한다. 아, 나는 부처가 아니다. 부처일 수가 없다. 특히 출퇴근 경의중앙선 안에 끼여 선 채로 가장 절실히 느낀다. 연차인 오늘도 여러 번 도착한 업무 연락 또한 나의 현 위치는 중생임을 알게 한다. 일주일에 고작 두 번 하는 운동을 하러 가는 길도, 지겨운 장마도, 날아다니는 벌레도, 안 하면 보고 싶지만 질 것 같으니 안 했으면 좋겠는 야구 경기도 내게 말한다.


야. 너는 부처가 아니야.


많은 이들이 잘 참는 사람을 보고 부처 또는 보살이라 말한다. 화를 잘 참는 사람, 부당함을 참고 넘어가는 사람, 서러움을 표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사람. 그렇다면 부처는 그릇이 커서 타인과 세상의 과오를 넉넉히 담아낼 수 있는 이를 가리키는 걸까.





내가 찾은 부처는 조금 다르다. 부처는 잘 참는 이가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는 이다. 참는 것은 쌓이기 마련이고 얹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쌓이다 얹힌 것은 언제든 역류하고만다. 부처는 잘 먹는 사람이 아니라 잘 소화시키는 이, 모든 소용과 필요의 허상을 아는 이, 더 나은 것과 덜 나은 것의 경계를 지우는 이, 그릇이 큰 게 아니라 존재가 우주만 하여 모든 상념을 ‘있는 것’보다 ‘있다가 없어질 것’으로 내버려 두는 이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교가 추구하는 우주는 먼 지구 밖이 아니라 존재 내면에 떼려야 뗄 수 없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우주를 자각할 수 있냐는 것이다. 하늘보다 높은 곳을 향해 목을 꺾고 바라보던 우주에서 눈을 돌려, 그보다 훨씬 가까이에 ‘그저 있는’ 우주에 시선을 돌릴 수 있느냐는 것. 그것이 중생일지 부처일지를 결정한다.


나는 부처가 아니다. 결코 부처일 수 없다. 부처일 수 없는 수백 가지의 이유가 있다. 더운 게 싫지만 추운 것은 더 싫고, 주먹만 한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 경기의 1분 1초에 고통받을 것이며,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출근이 하기 싫어 벌써부터 괴롭다. 꿈의 정원 어린이집 앞에서 담배를 태우며 지나가는 저 사람을 속으로 이미 판단해 버렸다. 장마가 지나면 슬슬 떠날 준비를 할 여름도 야속하다.

그리고 이 갖가지 이유와 견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내가 부처를 꿈꿔도 되는 이유. 나는 부처가 아니다. 그러니 가깝거나 먼 미래에 부처가 될 수 있다. 파도와 모래사장처럼 매 순간 경계가 생겨나고 지워지는, 중생과 부처. 눈으로 찾을 수 없는 그 간극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건너갈 것이다. 맨발과 맨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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