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이아는 ‘대지의 신’이다. 그 앞에 ‘모두’를 의미하는 접두사 ‘Pan’을 붙이면 ‘모든 땅’을 의미하는 판가이아(Pangaia)가 되고, 이는 판게아(Pangaea)의 어원이다. 1915년 독일의 베게너(Alfred Wegener)가 약 3억 년 전에는 지구상의 모든 땅이 하나로 뭉쳐 있었다고 주장하며, 그 때 뭉쳐 있던 대륙을 ‘판게아’라고 명명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판게아는 유라시아, 남북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디아, 호주 및 남극 대륙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이 ‘대륙 이동설(Continental Drift)’이다. 지금도 대륙은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과학자들은 북아메리카와 유럽은 매년 조금씩 멀어지니 대서양은 더욱 넓어질 것이고, 아프리카와 유럽이 점점 가까워져 결국 지중해는 없어질 것이라고 본다. 이는 지구 껍데기인 지각 아래에는 지금도 순환하는 뜨거운 액체 상태의 맨틀이 있고 그 위에 대륙과 대양이 얹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양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대륙은 지정학을 잉태했다.
각 대륙에 산재한 자연과 인문의 다양한 현상, 그리고 그 상호 관련성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 Geography, 지리학이다. 그러나 이 Geography와 Politics(정치학)의 합성어 Geopolitics, 즉 지정학(地政學)은 대륙보다도 더 넓은 의미를 내포하여 그 정의조차 명료하게 내리기 힘들다. 지정학이란 주권 국가의 위치 등 지리적 영향이 정치, 경제, 안보 등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려는 관점을 의미한다. 학(學)이라 하지만 지리학, 경제학, 정치학, 역사학, 철학 등 광범위한 지식을 총동원해서 분석하는 ‘포괄적 관점’이다. 예를 들어 지정학적 리스크(Geopolitical Risk)라 함은 전쟁, 제재, 정치, 경제, 무역, 에너지, 역사 등 주권국가 간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리스크이다. 지정학이란 용어는 1916년 스웨덴의 정치학자 루돌프 헬렌이 처음 사용하였으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제관계와 경제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데 중요한 ‘관점’으로 자리잡았다. 가장 쉽게는 ‘인접 국가와는 친해질 수 없다’는 상식에서도 출발한다.
요즘 매스컴에서 국제관계나 경제를 설명하는 데 ‘지정학적 환경, 지정학적 요인 또는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용어를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지정학적 리스크의 전형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충돌하는 지역의 위험성이다. 그 전형적 예가 한반도에서 전쟁은 중국, 러시아의 대륙세력과 일본, 미국의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리스크라고 설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현대사회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마스터 키처럼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특히 경제현상에서 그 원인을 파고들어 가면 맨 밑 바닥에 남는 것은 지정학이다. 그래서 많은 경제 관련 기사에는 ‘지정학’이라는 단어가 약방의 감초처럼 들어간다. 예를 들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홍해의 불안 고조에 따른 금값 상승, 미-중 갈등에 따른 한국 조선업의 활황, 달러 강세, 경제 성장률 둔화, 무역이 경제 성장을 더 이상 견인하지 못하는 이유, 에너지 및 기후 문제, 글로벌 공급망 재편 등의 기저에는 지정학적 이유가 있다고 설명된다. 심지어 미국의 반도체지원법(칩스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도 지정학적 정책의 산물이라고 설명되며, 트럼프의 재집권 시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와 보호무역 정책의 강화로 지정학적 리스크가 증폭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2024년 현재, 지구상에서 지정학적 리스크가 증폭되고 있는 주요 원인으로는 다음의 4가지가 주로 거론된다.
첫째, 다극화(多極化) 체제로의 전환(Multi-polarization)이다. 미국은 운 좋게도 아래와 위로 약한 나라를 둔 대륙국가이면서 동시에 대서양과 태평양을 접한 해양국가로서, 그동안 유일한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최근 경제블록화가 심해지면서 미국과 동맹국 중심의 단일체제에서 다극체제로 전환되고 있으니, 우리는 점점 분열되는 세상을 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G7 과 BRICS이다. 최근 이집트, 이란, 이디오피아, 아랍에미리트 그리고 사우디 아라비아가 BRICS에 가입하면서 회원국이 두배로 늘어났고, 그 경제규모는 세계의 30%를 차지하니 달러 패권에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거기에 NATO 와 러시아 간의 긴장도 한층 고조되고 있다.
두번째 원인으로는,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이다. 이것은 신흥 강국이 부상하면 기존 강국이 이를 견제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쟁을 의미한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기존 강국 스파르타가 떠오르는 강자 아테네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고, 그것이 결국 펠로폰넨소스 전쟁을 야기했다고 기술했다. 현재 미국은 떠오르는 중국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니 여러가지 견제를 하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전쟁을 원하지는 않으므로 그 함정(Trap)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전쟁까지 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버드대학 그레이엄 엘리슨 교수는 미,중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져 서로 원치 않는 전쟁으로 치닫는 치킨게임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역사적으로 중세이후, 신흥세력이 지배세력에 도전했던 16개 사례 중 12개가 그 함정에 빠져 전쟁까지 갔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세번째 원인은 국제 자유질서의 쇠퇴이다. UN, WTO, IMF 등 주요 국제기구가 과중한 업무, 자금 부족, 강대국의 비 협조 등으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협력과 공조는 없고 각국은 변하지 않는 진리인 ‘자국 이익’을 위해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고 있다. 보호무역주의의 강화와 공급망 다변화, 리쇼어링 압력 등으로 그동안의 세계화(Globalization)가 새로운 형태의 활로를 모색해야 할 때가 되었다.
마지막 주요 원인은 기후위기이다. 미국의 한 컨설팅 사는 2024년의 가장 큰 지정학적 이슈로 기후위기를 꼽고 있다. 이미 극심한 가뭄과 이상 기온 등으로 인한 물 부족은 투르키에, 시리아, 이라크 그리고 북 아프리카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지정학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현대 경영학의 대부 피터 드러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미국의 대통령은 미래를 창조할 만한 리더이다. 리더로서 대통령이 경제학자에게 질문하면, 그들은 너무나도 많은 변수를 가지고 응답했다. 그래서 레이건 대통령은 “경제학자에게 100개의 질문을 하면 3,000 개의 답이 나온다” 고 한탄했다. 그 이유는 지정학이다. 지정학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수를 수없이 내포하고 있으니 경제학자를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자국 이익이 최우선인 주권국의 경제정책에서 지정학을 고려한다면, 시장에 의한 자원배분의 효율성과 자유무역이 항상 실현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맨틀 위에 대륙과 대양이 떠있는 것처럼 지정학은 피할 수 없는 환경적 변수이다. 따라서 지정학적 흐름과 변화 그리고 리스크를 감지하는 기업내부의 조직과 정보수집 능력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어디에나 있고 날로 복잡해 지고 있다. 그것을 감안하여 특정공장, 특정국 또는 단일 공급망에 의존하는 정도를 낮추어 가는 것이 새로운 형태의 세계화이다. 이는 탈세계화(Deglobalization)가 아니고 ‘Reglobalization’ 이라 불린다. 이것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추진해야 할 지는 기업이 파악한 지정학적 리스크 정보에 기초하여 결정할 사항이다.
[진의환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니스트/ 소프트랜더스㈜ 고문/ 전 현대자동차 중남미권역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