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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켸빈 Oct 13. 2021

지금 당장의 만족을 유예하는 삶

나는 내 행복을 미루고 있었다

탈색모의 필연적인 굴레, 검은 뿌리가 자라고 말았다. 벌써 탈색한 지 3개월 정도 되었나 보다. 샛노란 머리와 검은 뿌리의 조화는 꽤 너저분스럽다.


 오늘 빈티지 옷들을 쇼핑몰에 업로드하며 종일 생각했다. 이따 뿌리 탈색하러 미용실 가야지. 아니다. 조금 더 이따가 가야지. 네다섯 시에 이르렀다. 어차피 지금 가면 대기시간 길 것 같으니까 내일 가야지. 그리고 방금은 또 다른 생각을 했다. 뿌리 탈색해 봤자 특별히 만날 사람도 없는데, 약속 생기면 그때 할까.


 나름 합리적인 생각 같지만, 뿌리 탈색을 미루면 미룰수록 나는 거울을 통해 짙고 보기 싫은 뿌리를 길게 마주해야 한다. 이렇듯 나는 막연한 언젠가를 위해 지금 나 자신만의 만족을 너무 간단히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이와 비슷한 경험들이 데자뷰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바람도 선선하고 마음도 차분해서 공부가 잘 될 것 같은 기분인데, 어차피 오늘 공부해도 시험기간엔 다 까먹을 테니까 그냥 안 해야지(?). 나중에 제대로 하면 되니까. 그러면서도 이상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시간을 허투루 보낸다.


옷을 사려다가도 어차피 특별히 입고 나갈 일도 없을 텐데, 안 사고 만다. 결국 내가 픽했던 그 패션은 시도해보지 못하고 세월에 묻혀 영영 사라진다.


혼자 떠난 여행지에서 레일바이크를 타고 싶은데 다들 두 명 이상이라 머쓱하다. 그냥 나중에 누구랑 같이 와서 타야지. (다시 그 여행지에 갈 일은 지금까지도 몇 년 간 없었다.)


오사카나 오키나와에 정말 가보고 싶은데, 돈 아껴야 되니까 참아야지. (결국 그때 아낀 돈은 흐지부지 어딘가로 날아가고, 몇 년 후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하늘길이 막혀버렸다.)


목욕탕 가서 세신 한 번 시원하게 때리고 싶긴 한데, 아직 피로가 덜 누적된 것 같으니 버텨봐야지. (역시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이후 2년 넘게 목욕탕엘 못 가게 되어 버렸다.)


일단 몸무게 44kg이 되면 맘껏 먹어야지. 그 행복을 위해 오늘 내일 모레 글피를 미친 듯이 굶는다. (이는 만족의 유예를 떠나 심신을 자해하는 정신병적 행위였다.)


주민센터 요가 교습받고 싶은데, 겨울이라 추우니까 봄부터 해야지. (이듬해 폐강되었다.)



물론 우리 모두는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 안에서 나름 절제와 금욕의 선택지를 고르는 것은 물론 당연하다. 내가 오늘 생각한 '만족의 유예'는 그것과 살짝 결이 다른 이야기다.


'나중에', '상황이 맞을 때'를 막연하게 설정해 두고 그냥 흘러 보냈을 나의 소중한 순간과 경험들. 우리에게는 각자 그때의 그 상황과 감성, 취향으로만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이 있다. 그런 순간과 기회들은 대부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나중만을 기약하며 현재에 충실하지 못해 적기를 떠나보낸 사례들이 내게는 참 많았다.


오늘의 짧은 성찰을 통해 저스트 두 잇! 하는 삶으로 갑자기 바뀔 수는 없다. 하지만 소소한 선택의 기로에서 지금 나를 진정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지를 우위에 두고, 기회와 현재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길 것이다.


그러니까 내일은 가능한 뿌리 탈색을 하러 가야겠다. 비록 나갈 일 없더라도 나는 매일 거울을 마주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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