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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망상이 예술을 지배한 시대다. 그러나 망상의 강을 넘칠 듯 흐르는 폐수 속에서도 드물게 진정한 예술은 빛났다. 지금까지 한국 현대예술 중에서 시, 소설, 영화를 살펴보면 눈부신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이 있다. 이들의 작품이 진정한 예술인 까닭은 다름 아니라, 예술은 시대의 절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희망이든 절망이든 분노이든 사랑이든, 예술가가 살던 시대가 안고 있던 인류 보편 가치에 대해 나타나는 예술가의 격렬한 반응이 예술이다. 예술에서 인류 보편 가치란, 예술인이 느끼는 가치이고 그것은 같은 시대 누구에게나 보편적 공감을 주는 즉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일 터이다.
일제 강점기 제국주의 일본은 무력 침략으로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고 강제 식민지지배를 했다. 조선 민족을 식민지 노예로 악랄하게 착취하고 차별했다. 이것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부수는 행위이고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고 이상은 생각했다. 따라서 이상은 연작시 「오감도」라는 제국주의 일본 무력 침략과 국권 침탈 그리고 극악한 식민지배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1인 전쟁의 시를 썼다.
이러한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가치에 공감하지 않는 일제 강점기 조선 민족이 있었을까? 이것이 진정한 예술이고 시다.
김소월 또한 제국주의 일본의 국권 침탈과 식민지배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특히 앞잡이가 되어 같은 민족을 극악하게 수탈하는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배에 앞장서는 미래에 나타날 친일파에 대해 조롱과 혐오 그리고 죽음의 결별을 예고하는 「진달래꽃」, 고종의 죽음으로 희미하게 남아있던 국권이 사라져버린 사실에 통곡하면서 죽어 망부석이 되더라도 결코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초혼」이 진정한 예술이고 시다.
한용운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선언한다. 고종의 죽음으로 남아있던 국권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버렸지만, 오히려 고종의 죽음을 발판으로 새롭고 더 강력한 국권 회복의 결의를 다짐하는 「님의 침묵」과 「알 수 없어요」 「복종」 「나룻배와 행인」 등으로 조선의 독립을 절절하게 외친다. 이것이 예술이고 시다.
1945년 해방 이후 시대를 김수영은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라며 시 「공자의 생활난」에서 본말이 전복된 사회, 즉 가치 전복된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거짓과 위선과 가식이 아닌 사물의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고 외친다.
또한 1968년 유고작으로 발표된 「풀」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3선 개헌은 영구 독재로 가는 길이라고 외치면서 4.19와 같은 민중 혁명이 일어나 영구 집권으로 가는 3선 개헌을 막아야 한다고 절규한다. 이것이 예술이고 시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는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또한 2025년 뉴욕타임즈 20만 독자가 선택한 21세기 최고 영화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1위로 선정되었다.
봉준호는 영화 기생충에서 신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처참하게 미쳐가는 21세기 현대인 광기의 삶을 보여준다.
영화 시작 부분 기택 앞에 꼽등이가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꼽등이는 자본주의라는 기생충이 신경 물질을 분비해서 숙주인 인간을 미쳐가게 하고 결국은 자멸하게 만들 것이라는 영화 주제를 상징한다.
그리고 영화 기생충의 처음 제목이 로르샤흐였다고 한다. 두 번째 제목이 데칼코마니였고 최종적으로 기생충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스위스 정신과 의사인 로르샤흐는 로르샤흐 검사법의 창시자다. 로르샤흐 검사법은 잉크반점 그림으로 정신분열증을 감정하는 방법이다. 데칼코마니와 흡사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봉준호 감독은 관객이 영화 기생충을 보는 것은 정신분열증 검사를 받는 것이고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정신병자라고 느끼지 못한다면 관객인 당신 역시 신자본주의 기생충에 감염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채 미쳐가는 숙주라는 사실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이고 영화다.
2024년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한글 소설이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에서는 제대로 해석조차 못 하는데, 오히려 외국어로 번역된 번역본을 읽은 외국인들이 한강의 작품 의도에 근접하는 해석을 하고 더구나 노벨상까지 주었다는 것이다. 이건 한국 현대문학 100년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기적이기도 하다.
한강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일어난 국가 권력에 의한 학살에 대해 격렬하게 절규하며 규탄한다. 한국 현대사에 가장 큰 학살은 제주 4.3과 광주학살이다. 놀랍게도 한강은 채식주의자에서 중편 소설 3개로 나눠 단계적으로 누가 어떤 방식으로 왜 학살을 명령하고 학살을 실행하는지를 너무나도 세밀하게 보여 준다.
1편 채식주의자에서 학살의 첫 번째 단계인 낙인찍기와 폭력의 당위성 만들기를 보여 준다. 주인 딸의 다리를 문 개는 죽여서 삶아 먹어야 한다. 주인 딸의 다리를 문 개라는 낙인찍기와 죽여서 삶아 먹어야 한다는 폭력의 당위성이다. 이러한 낙인찍기와 폭력의 당위성에는 어떤 이유도 원인도 사정도 진실마저 필요하지 않다. 오직 집단적 선동과 세뇌뿐이다. 이를 다리를 문 개고기를 먹어야 상처가 낫는다는 이웃 아저씨의 말에 주인공이 개고기 국을 맛있게 먹는 장면으로 각인시켜 준다.
2편 몽고 반점에서 한강은 학살을 명령하는 자는 어떤 자인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거짓으로 자신을 예술가로 위장하고 주인공의 약점을 이용해서 법도 도덕도 인간의 마지막 양심마저 부수고 짓밟는 자가 학살 명령자임을 알려 준다.
3편 나무 불꽃에서 한강은 학살을 실행하는 바탕은 광기의 혐오라는 것을 절절하게 외친다. 그런데 혐오는 앞서 낙인찍기에 이어지는 폭력의 당위성과 마찬가지로 원인도 사정도 진실마저 외면한다. 특히 언니 인혜는 망상의 자기 확신으로 주인공 동생 영혜를 혐오한다. 망상의 자기 확신과 분노 그리고 광기의 혐오는 주인공 동생 영혜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병원에서 퇴원시키지 않는다. 동생 영혜가 정신병원에서 살다가 죽기를 바라는 학살을 실행한다.
인류를 향한 인류의 학살과 마찬가지로 같은 형제, 같은 민족, 같은 국민을 향한 학살은 인류의 존엄을 부수는 짐승과 다름없는 짓이라고 작가 한강은 21세기 한국 사회와 인류를 향해 소리치며 절규한다. 이것이 예술이고 소설이다.
물론 어떤 시대이고 음풍농월을 예술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음풍농월은 예술 기술자가 예술 흉내 내기로 생산하는 상품이다. 가령 왕가위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영화 기술자다. 그래서 “중경상림”은 작품이 아니고 상품이다.
21세기는 AI 시대다. 예술의 강에 뒤섞여 망상의 폐수로 흐르던 예술과 예술 기술이 각각의 길을 따라 이제는 나뉘어 흘러가야 한다. 둘로 나뉜 물줄기가 강물로 흐를지, 도랑물로 흐를지는 이미 와있는 AI 시대에 예술가나, 예술 기술자가 어떤 작품,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가에 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