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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시간당 10,570원입니다"

by 행복만땅

아침 라디오에서 DJ가 10월 2일인 오늘이 무슨 날이냐며 시청자 퀴즈를 낸다. 정답은 '노인의 날'. 하루하루를 무심히 살아가던 나는 오늘이 노인의 날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런 날이 있는지도 몰랐다. 문득 노인이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온다. 2024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노인 인구는 1,000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거리를 활보하는 다섯 명 중 한 명이 노인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노인 연령을 65세로 산정하고 있다. 작년에 정년퇴임을 한 나는 아직 법으로 정한 노인은 아니지만, 그 대열에 합류할 날이 바로 코 앞에 있다. 노인이란 말을 곱씹어 보면 신체적으로 조금 노쇠함이 시작되는 나이가 아닌가 싶지만, 나이 먹어도 헬스, 마라톤 등을 통해 건강하고 활력 넘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생물학적 나이가 꼭 노년을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그의 능력이 사회적으로 저평가되고, 하는 일이 없어질 때가 진짜 노년이 아닌가 싶다. 무료함이 지배하는 상황 말이다.


10월이 되고 날씨가 여름을 완전히 벗어나 가을 초입이 되니 작년 11월 노인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서류를 내고 면접을 봤던 일들이 떠오른다.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입사 시험을 치르는 것 마냥 조금은 긴장까지 되었다. 개인적으로, 정년 퇴직한 많은 사람들 처럼 등산이나 여행만을 소중한 가치로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이웃과 나 자신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 바람으로 일자리를 지원하게 되었다.


1차 서류에 합격하고 면접을 보러 갔는데 몇 가지 신체적 기능 테스트, 예를 들면 앉았다 일어섰다 30회 하기, 한 발로 20초 동안 오래 버티기를 했다. 민원인이 물어본다고 가정하고 서구청에서 검암역 가는 길을 찾아 보여달라는 주문도 했다. 나는 다행히 '네이버 길 찾기'를 다룰 줄 알아 면접관이 제시하는 답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 덕분인지 3대 1의 막강한 경쟁을 뚫고 민원서비스 지원단에 합격할 수 있었다.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고 싶지만, 제공된 일자리는 협소하다. 있다 해도 다시 서류통과와 면접을 거쳐야 한다. 무한 경쟁을 늘 통과해야 한다. 더군다나 합격하고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시간당 단가가 정부노임단가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루아침에 연봉 몇 천만 원에서 시간당 10,570원의 비정규직 단기 노동자로 전락한 것이다. 이제까지 방송에서 사용자와 노동자가 협상하는 것이 남의 일로만 여겨졌는데 이제는 내 일자리의 기준이 되어버럈다.


이러한 일자리 체험을 통해 우리나라 비정규직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하게 되었다. 2024년 임금을 받는 노동자 2,300만 명 중 비정규직이 800만을 넘어선 선 걸 생각해 보면 정규직 일자리는 1,5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초등학생에게 " 네 꿈이 뭐니?"라고 물을 때 "정규직입니다."라는 우스갯소리도 들리는 것 아니겠는가. 사업을 하는 기업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현재 550만 정도가 개인 사업자인데 월 100만 원 미만의 수입이 전체의 70%를 차지한다는 통계도 엊그제 뉴스로 발표됐다. 세무서에서 민원 서비스 일을 하면서 폐업신청 하러 오는 경우 '그 속이 어떨까?' '사업을 몇 달이나 지속했을까''빚은 얼마나 떠안았을까?'생각하면 측은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들곤 한다. 그런 이유로 폐업자에게 주어지는 각종 혜택을 더 잘 설명해 주기도 한다.


노인들에게 닥친 제일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는 그들이 갈고닦은 영역에서 자신에게 꼭 맞는 일자리가 제공되고 그 일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십문 발휘하는 일자리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단기 일자리고 노임도 턱없이 낮다. 물론 그것이 조금은 경제적 도움을 주는 측면도 있다. 이제는 노인을 허드렛 단순 노동을 하는 사람에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새로운 자원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 때다. 일을 해야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을 노인들은 잘 알고 있다. 일을 놓아 버리는 순간 자신의 효용가치가 떨어진다고 느끼게 된다.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고 마땅히 시간 때울 곳이 없어 탑골공원이나 서울역 앞에서 무익한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일의 가치는 하는 일의 중요도와 기여도에 따라 달라진다. 노인 일자리도 그런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데 지금의 일자리는 천편일률적이고 단가도 동일하다. 정책 입안자는 노인의 능력과 적성, 경력에 맞는 다양한 임금 구조를 짜야한다. 단순히 '놀리지 않고 무슨 일이든 만들면 되지.'라는 생각은 자칫 단순한 단기 일자리만 양산할 뿐이다. 그 일이 끝나고 사업을 재평가할 때 정작 일을 하는 사람이나 일자리를 마련한 정부가, 기업의 사용자가 서로 만족할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제 노인 일자리를 누구나 세 시간으로 고정할 일은 아니다. 시간당 임금도 10,570원이라는 정부노임단가만을 적용할 이유는 없다. 유연한 시간 배정과 임금의 변화가 필요하다. 교육학에서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아이 교육을 위해서는 온 마을, 사회가 직, 간접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노인들의 경험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그동안 쌓아오고 실험한 다양한 노인들의 경험이 세대마다, 경력마다 우리 사회에 맞춤형으로 제공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이제는 노년이 퇴직하고 허구한 날 방구석을 지키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시대는 아니다. 자식들을 바라보며 부양의 의무를 지라고 협박하는 시대도 아니다. 이제 노년은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일자리를 위해 자기 발전을 꾀하고, 아프지 않도록 신체를 단련하며, 후세에게 신세를 지지 않도록 자신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아직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현직에 있을 때의 소득 40%선에 머물고 월평균 수령도 2025년 기준 70만 원에 미치지 못한다. 계산기를 가지고 기초연금, 국민역금을 합쳐봐도 도시 부부합산 적정 노후 생활비 324만 원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결국은 여유로운 생활도 되지 않아 행복한 노후를 보내기는 더 어려워진다.


노년이라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건물주이거나 부모로부터 거액의 증여를 받거나 로또에 당첨되는 행운이 없다면 그는 또다시 무슨 일이든 하여야 한다. 그가 현장에 나가 "임금이 시간당 10,570원입니다."란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장밋빛 희망은 오래된 성곽처럼 무너져 내린다. 그에게 다시 "선생님, 그전 다녔던 노하우를 반영해 다니셨던 직장의 최후 10년간의 월평균 임금을 드리려 하는데, 서운하지 않으십니까? 란 말을 듣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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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연(道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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