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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재 May 14. 2022

생각이 너무 많아질 때 만드는, 무국적 카레

  사람마다 '멍하게 있는 것'에 대한 정의가 다를 수 있다는 걸 얼마 전에서야 알았다. 누군가는 멍하게 있을 때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있는 거고, 누군가는 멍하게 있을 때 속으로 오만가지 잡생각을 하는 중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나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할 수 있다. 후자라고.


  나의 특성 중 하나는 생각이 많다는 것이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많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걸을 때도 먹을 때도 누가 곁에 있을 때도 머릿속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곤 한다. 아니, 이런저런 개꿈을 자주 꾸는 걸 보면 잘 때조차 생각은 계속 꿈으로 상영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에너지 좀먹고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그 '생각'이라는 사실을 십 년 전 한 권의 책을 읽고 알았다.     


정신과 환자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이 많은 사람을 봐도 생각이 많다. 정신적인 고통이나 문제는 생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실 우리가 힘들어하는 것이나, '이것은 내가 죽기 전에는 벗어나기 힘들 거야' 하며 생각하는 것이나, 콤플렉스로 생각하는 것도 자세히 보면 생각을 많이 한 것이다.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 없다. 그것에 관한 생각을 줄이면 거기서 벗어난다. 

<정신과 의사가 들려주는 생각 사용 설명서 中> 전현수     


  책에 따르면 마음의 속성은 동시에 두 곳으로 갈 수 없다고 한다. 생각이란 주로 과거나 미래로 마음이 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생각을 따라가 버리면 내 몸은 현재에 있으나 사실 현재에 있지 않은 상태가 된다. 그리고 허깨비와 다름없는 불필요한 걱정에 잠식당하며 살게 된다. 


  그럼 그 생각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알아차림'이 생각을 다스리는 첫걸음이라고 역설한다. 무심코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났구나'라고 알아차리면 그 순간 생각은 사라진다고 한다. 자꾸 생각이 떠올라서 힘들다면 들숨을 들이쉬고 날숨을 내쉬는 코끝의 행동에만 집중하여 생각을 물리치는 호흡 명상도 제시되어 있었다.


  책을 읽은 지 거의 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속에 생각은 너무 많고 명상은 어렵다. 그래도 책 속의 가르침만은 잊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무심코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알아차림을 통해 빠져나온다든가 생각으로 혼탁한 마음을 다스리고자 종종 들숨과 날숨에만 집중하는 간단한 명상을 시도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온건한 방법으로는 도저히 생각에 저항할 수 없는 때가 있다.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인간관계가 뜻대로 안 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때의 생각은 댐을 터뜨리는 흉포한 검은 물처럼 기세가 대단해서 나를 그대로 휩쓸어 버린다.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걱정 따위에 휩싸여 몸을 웅크리고 한동안 끙끙대던 나는 조금 기운을 차리면 이 괴로움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되뇐다. 인제 그만 생각을 물리쳐야 할 때다. 그럴 때 나는 일어나서 카레를 만든다.


  왜 하필 카레냐고? 내가 할 줄 아는 요리 중 가장 복잡한 요리가 카레라서 그렇다. 문장으로 써보니 훨씬 더 부끄럽지만, 아무튼 사실이다. 머릿속이 산란할 때 몸을 움직여서 바쁘게 만드는 건 확실한 도움이 된다. 만약에 내가 더 복잡한 요리를 할 줄 알았다면 그 요리를 했을 것이다. 비록 내가 요리를 잘 못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변명을 좀 해보자면, 내가 만드는 카레는 평범한 카레가 아니긴 하다. 조금 더 수고롭고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야 한다.


  저번 글에서 언급했듯, 본격적으로 비건 지향을 시작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고태기(고기 권태기)를 느끼며 요리에서 하나둘 고기를 빼는 실험을 했었다. 그중의 하나가 카레였다. 고기를 덜어낸 그 자리 이상으로 맛을 채우고자 실험적인 시도들이 이어졌고 결론적으로 그 모든 시도가 합쳐졌을 때 고기 없이도 가장 맛있는 카레가 탄생했다. 그 모든 시도를 포용해주는 점. 카레가 진정 멋진 음식인 이유다.


  가장 먼저 양파를 손질한다. 한 손에 뿌듯하게 잡히는 큼직한 것으로는 두 개, 작은 것으로는 세 개쯤 필요하다. 예전에 어떤 에세이에서 '양파를 손질하며 그 껍질이 손에 닿는 감각을 느끼며 자연과 교감한다'라는 맥락의 문장을 읽은 적 있는데 나는 그 작가님이 진짜 양파를 손질해본 적 있는지 의심했을 만큼 양파 손질하는 것이 싫다. 비쩍 마른 껍질에는 먼지가 묻어 있고 벗기다 보면 바스러져서 조각조각 떼어 내야 할 때도 있다. 게다가 잘못 마른 양파는 한 커플 벗기면 속이 검게 썩어 있는 걸 발견하고 식겁할 때도 있다. 


  껍질을 다 벗겨내도 고난은 끝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가가 되기 전 '피터 캣'이라는 바의 오너였다. 메뉴에 있던 롤 캐비지를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파를 썰었고 그때 숙련된 덕분에 지금도 양파를 썰 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의 경우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의기양양 시작하다가 종국에는 벌게진 눈으로 흐느끼며 양파 썰기를 몇 년, 이제는 더이상 울지 않는다. 대신 부엌 서랍에 넣어 둔 수경을 꺼내서 장착한다. 양파를 썰 때는 다지지 않고 결을 살려 세로로 얇게 썬다. 낡은 물안경을 쓰고 흐릿한 시야 속 손끝에 집중해서 양파를 썰고 있노라면 칼과 나무 도마가 부딪히는 소리만 고요한 부엌에 울려 퍼진다.


  양파는 내가 만들 고기 없는 카레의 핵심 주인공이다. 다듬는 과정이 싫어도 묵묵히 해낸 이유다. 도마 위에 채 썬 하얀 양파가 수북하게 쌓이면 물안경을 벗고 바닥이 두툼한 스테인리스 냄비를 꺼내 불에 올린다. 코코넛 오일도 두어 스푼 두른다. 그 위로 양파를 쏟자 달구어진 바닥과 만나 촤아아 경쾌한 소리가 난다. 중간 불을 유지한 채 나무주걱으로 양파를 볶는다. 생각보다 꽤 오래 볶다 보면 수북했던 양파의 수분이 많이 날아가 부피가 많이 줄어들고 색도 눈에 띄게 노릇해져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더 볶아야 한다. 오래오래 볶아서 콜라색이 날 때가 베스트지만 인내심이 부족한 나는 그 직전쯤에서 만족하고 타협하는 경우가 더 많다. 부피가 바짝 줄고 투명한 갈색으로 졸아든 양파에서는 근사한 향기가 피어오른다. 그 위로 물을 부으면 캐러멜라이즈 된 양파에서 농축된 감칠맛과 깊은 단맛이 나와 물에 우러나온다. 카레의 베이스가 될 국물이 비로소 완성됐다.


  이 카레에 어떤 채소가 들어가야 하는지 정답은 없다. 그때마다 냉장고 사정에 따라 넣는다. 하지만 되도록 빠트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토마토. 토마토가 들어가야 은은한 산미가 돌아서 맛이 한층 섬세해진다. 하지만 욕심껏 토마토를 너무 많이 넣으면 카레가 아닌 토마토 스튜가 되므로 절제의 미학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완두콩, 호랑이콩, 강낭콩 등 여러 종류의 콩을 섞어서 넣는 것을 좋아하는데 저마다 색과 모양도 예쁘고 포슬하니 식감도 좋다. 브로콜리나 버섯도 저마다 매력을 카레에 더해주는 재료다. 단, 감자와 당근은 들어가는 순간 모든 카레를 '급식'으로 만드는 점 때문에 나는 즐겨 넣지 않는다.


  모든 재료가 함께 끓어오르고 점점 더 국물의 맛이 깊어질 때쯤 카레를 넣는다. 내가 사용하는 건 일본에서 온 고체 카레이고 동물 성분이 포함되지 않은 걸 확인했다. 하지만 성분표를 확인하면 '밀'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카레에 밀이 왜 들어 있는 걸까? 왜냐면 한국과 일본은 카레를 주로 밥에 비벼 먹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밥과 어우러지는 걸쭉한 식감을 내기 위해 밀가루가 들어 있다. 카레를 먹은 후 더부룩하거나 물이 당기는 느낌이 든다면 아마 자신도 모르게 밀가루를 많이 섭취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원래 넣어야 할 양의 절반만큼만 카레 큐브를 넣는다. 그러면 나머지 맛은? 온갖 이국적 향신료가 등장해서 나머지 맛을 채울 시간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신료는 큐민(쯔란)이다. 숟갈에 큐민 가루를 수북이 쌓아서 끓는 냄비에 넣는다. 그다음으로는 코리앤더 가루를 넣는다. 한국에서 고수라고 알려진 풀의 이파리 부분은 영어로 실란트로, 씨앗은 코리앤더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실란트로와 달리 코리앤더의 풍미는 한결 대중적이다. 이어서 시나몬과 강황 가루도 조금 넣는다. 부족한 간은 소금을 넣고 맛보며 맞추고 마지막으로 비장의 킥, 코코넛 밀크를 취향껏 넣어주면 일본에서 시작해서 인도로 항해하던 카레가 태국으로 키를 돌린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카레의 맛은 완성됐지만, 밀가루가 적게 들어간 탓에 질감이 묽은 게 아쉽다. 그래서 넣는다. 그 이름은, 들.깻.가.루. 갑자기 한국의 들깻가루가 왜 나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짜잔님의 블로그에서 발견한 팁이다. 평화롭던 항해가 한국으로 키를 돌려야 할까 봐 잠시 우왕좌왕하지만 이윽고 잠잠해진다. 들깻가루를 몇 스푼 카레에 넣었다고 갑자기 카레가 들깨탕이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국 향신료들과 채소의 압도적인 퍼포먼스 속에서 자신의 맛을 드러내지 않고 단지 걸쭉한 질감만 더해주는 들깨의 겸허함이 빛난다. 하지만 그 영양가만큼은 감히 흰 밀가루 따위가 범접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완성된 카레를 한 입 맛보고 이 카레의 국적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태평양과 인도양 사이 어드메일까. 아니, 이 토마토의 향기는 뭐지? 지중해인가…. 그저 무국적 카레라고 부를 수밖에 없겠다. 고기 없이도 오묘하게 맛있는 이 무국적 카레를 만들기 위해 칼질하고 볶고 휘젓는 동안 너무 바빠서 생각할 틈도 괴로울 틈도 없었다. 하지만 요리를 끝내고 의자에 앉자 다시금 생각이 시작된다. 카레의 국적 논란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걱정이 다시 몰려온다. 그렇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는 것이다. 괴로움에 마음이 울컥 조여들려는 찰나, 생각을 멈추고 다시 현재로, 카레 앞으로 돌아왔다. 카레를 한 입 더 먹는다. 카레를 우물거리다가 이번엔 붓다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붓다는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자라고 하셨다. 자는 것은 무익한 것이지만 생각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이윽고 붓다에 관한 생각조차도 저편으로 완전히 몰아낸 채 나는 '지금 여기' 내 앞에 있는 무국적 카레 한 그릇을 온전히 먹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티베트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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