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뽈레 뽈레, 천천히 천천히>
열여덟 시간여의 긴 비행을 마치고 잔지바르 공항에 드디어 도착했다.
질서 정연하게 줄 서고 모든 것이 착착착 빨리빨리 진행되는 우리나라와 달리 잔지바르 공항은 크지도 않은데 그마저도 무질서 그 자체였다. 잔지바르는 아프리카 중에서도 손꼽히는 관광지라 잘 갖추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아프리카는 아프리카구나 싶었다. 공항엔 동양인은 나뿐인가 싶을 정도로 서양인들과 현지인처럼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들 이런 속도가 낯설지 않은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답답해서 속 터지는 건 빨리빨리의 민족, 한국인인 나뿐인 듯했다.
잔지바르에 도착해서부터 떠나기까지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뽈레 뽈레'이다. '천천히 천천히'라는 뜻인데, 빨리빨리의 민족 한국인에게는 이 문화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묵은 호텔에는 조식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조식을 먹으려면 새벽부터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시간 맞춰 조식을 먹으러 가야 하는 우리나라 호텔과 달리 그냥 손님이 눈뜨는 시간에 식당으로 나오면 조식을 만들어주는 식이랄까.
그리고 조식을 느지막이 먹은 탓에 체크아웃 시간인 11시에 맞춰 씻고 짐을 싸서 나가기 위해 서두르는 모습을 조금만 보여도 호텔 관리인이 여유롭게 다가와 한마디 건넨다. "뽈레 뽈레, 11시에 꼭 안 나가도 돼. 12시에 나가도 되니까 천천히 먹으렴." 맘대로 체크아웃 시간을 돈도 받지 않고 늘려줄 거면 규정은 왜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내 기억 속 잔지바르 사람들은 모두 여유로웠다. 물론 수프 하나 시켰는데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기다려야 될 때도 아무 말 못 하고 기다려야 했지만 말이다.
있을 땐 그 소중함을 모른다는 말처럼, 잔지바르에 있을 때만 해도 이런 불편함과 여유로움이 공존하는 뽈레 뽈레 문화가 나에겐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뉴욕이라 불린다는 케냐에 도착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외치고 있었다.
"돌려놔! 내 뽈레 뽈레"
케냐 공항에 내려 그 규모에 감탄하며 '역시 아프리카의 뉴욕은 다르다'며 친구와 노을뷰 공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때, 공항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와 시계를 툭툭 치는 행동을 하며 "춉춉! 춉춉!"(들리는 대로 적은 거라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이라 알 수 없는 단어를 외쳤다.
그들의 언어는 몰랐지만, 이건 분명히 '빨리빨리' 이동하라는 뜻일 거라고 확신했다.
이제 막 '뽈레 뽈레' 문화에 적응했는데, 이번엔 또 '춉춉'이라니?! 눈만 마주쳐도 '잠보!'하고 인사하며 웃어주던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사람들과 달리 귀찮음이 가득 담긴 무표정을 하고 있는 케냐 공항 직원들을 보자 '케냐 깍쟁이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 삭막한 케냐 깍쟁이들의 '춉춉'사회... 잠시 잊고 있던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 한국이 스쳐 지나가며'뽈레 뽈레'가 참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뽈레... 뽈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