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나이고 싶다
신비주의는 나와 안 맞아
친한 옛 직장동료이자 같은 모임의 멤버가 의미 있는 만화를 모임 단톡방에 올려 주었다.
17세기 스페인의 신부이자 철학자, 작가인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저서의 내용을 요약해서 만화로 만든 것이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쇼펜하우어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쇼펜하우어가 편역 한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글들은 1991년에 우리나라에 '세상을 보는 지혜'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90년 대 초에 나도 읽고 큰 감명을 받았고 공감했었다. 이후 그 책은 여러 가지 판본으로 항상 내 책상 가까운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최근에도 새로운 판본의 책을 교보문고에서 보고 구입했다.
오늘 모임 단톡방에 올라온 그 만화를 보고 댓글을 달았다.
'20대 때 접한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은 감명과 더불어 바이블 같은 책으로 느껴졌습니다. 아직도 그 책을 읽으면 대부분 공감하지만 지금 보니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고 신비감을 유지하라.'란 말엔 동감이 잘 안 되네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건 협상 같은 비즈니스에서는 필요할 수 있지만 사적인 인간관계에서도 그러고 싶진 않네요.
요즘 내게 드는 생각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 할 필요가 없다.'입니다. '나는 나일뿐'이고 '그런 게 나'이고 내 본연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려 합니다. 생존에 좋은 전략이 '기만'이라고 병법서나 전략서에는 나오지만,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속이기보다는 솔직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이런 나를 순진하다고 비난할 지라도요. 과거엔 이런 내가 싫었지만 지금은 싫지 않고 사랑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합니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고 신비감을 유지하라.'라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말은 아주 오래전엔 내 가슴을 때리는 의미심장하고 공감 가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냥 나이고 싶다.
물론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속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성격이 그렇지 않은데 그런 걸로 보이게 하는 건 솔직하지는 않다. 난 내 천성대로 그냥 솔직하고 싶다. 그게 나니까.
심리학적으로 '미지(未知)의 대상에게는 막연한 호감을 느낀다.'라고 한다. 따라서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고 신비감을 유지하라.'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조언은 지혜로운 말이다. 그 말에 지금은 동감하지 않는다는 내 말은 그 말이 옳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그럴 필요를 못 느끼고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건 좋지만, 더 나아지지 않고 지금 그대로여도 충분히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내가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신비감을 유지하게 될 때에도 나는 그런 나 자신을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