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개척하는 것
이사업체가 배치해 준 대로 살다가 레이아웃을 바꾸다
얼마 전 내 방의 레이아웃(layout)을 바꾼데 이어, 오늘은 아버지 방 정리정돈을 하다 레이아웃을 바꾸어 보았다. 이사 후 이사업체가 배치한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레이아웃을 바꾸고 나니 공간이 훨씬 넓어지고 깔끔할 뿐만 아니라 편리해졌다. 책상의 위치를 바꾸고 책상이 나간 공간에 침대가 이동했다. 책상이 옆 구조물과 자로 잰 듯이 길이가 딱 맞을 때 신기했는데 연쇄이동한 가구들도 길이에 맞춘 듯 맞는 게 신기했다.
가구들을 이동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사업체가 배치해 준 대로 살아가는 건 자신의 타고난 조건과 상황을 그냥 수동적으로 숙명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그런데 내게 주어진 조건과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노력하면 바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진 정리정돈과 청소는 내 적성에 맞지 않고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는데 최근 들어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목욕은 하기 싫지만 하고 나면 개운한 것처럼 정리정돈과 청소도 마찬가지다. 팬트리룸과 주방 냉장고 좌우의 수납함들에 적층식 반투명 플라스틱 서랍식 수납케이스들(60개 정도, 100만 원이 넘는 금액이 들어갔다. 배송기사가 수납케이스가 2개씩 든 박스들을 개봉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고, 수납케이스들을 이렇게 많이 사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그래도 수납장들을 사는 것보단 싸고, 공간확장 없이 수납양을 두 배 이상 늘려주었다. 기존의 수납공간에 길이와 높이가 딱 맞는 것도 신기하다. 물론 줄자로 실측하고 거기에 맞는 사이즈의 다양한 수납케이스들을 적층 하도록 조합하여 설계하긴 했지만.)을 사용하니 수납장 추가나 공간의 확장 없이 수납공간이 늘어나고 사용하기도 편리해졌다. 보기에도 깔끔하다. 서랍식이라 뒤쪽의 물건을 꺼내기도 쉽다. 급기야 수납, 정리정돈에 관한 책을 써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생각만으로 그치고 출판까지야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사람들이 이래서 책을 쓰나 보다 싶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고 못하던 것을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겼을 때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픈 욕구가 생긴다. 싫어해서 못하는 건지 못해서 싫어하는 건지 모르겠지만(아마도 싫어해서 안 하다 보니 못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듯하다), 하다 보면 좋아하게도 되고 잘하게 되는 일도 있는 것 같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쉼 없이 정리정돈을 하면서 시간이 아깝고 내가 왜 이리 가치가 낮은 일로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나 싶었는데 지나고 보니 무척 가치 있었고 깨달은 게 많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점이다. 길었던 집안 정리정돈의 끝이 보이면 그 상태를 잘 유지해 주고 다른 집안 일도 도와줄 가사도우미가 나타날 것이다. "하느님(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 애국가의 하느님) 하시는 일이 나쁜 게 없다."(누나가 자주 하던 말)고 두 달 반 전 가사도우미들(식사 담당, 청소 담당 두 분이 동시에 일했었다. 지인한테서 소개받은 분이 친구분을 데리고 와서 동시에 같이 일했다. 일당은 한 사람분, 대신 시간은 절반. 제의를 듣곤 재미있어서 웃으면서 수락했었다.)이 갑자기 그만두면서 (두 분이 일하다 싸워서) 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고 그 고난의 시간은 내게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내 방과 아버지방은 다 마무리 됐고 드레스룸과 팬트리룸의 전쟁터 같은 상황을 보며 글을 쓰고 있다. 끝은 있고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절반 정도 남은 빈 수납케이스들을 채우면 거의 끝난다. 오늘 아버지께서 안방의 전자제품의 전원케이블들을 고무밴드로 묶어놓으신 걸 보고 3M의 케이블타이를 찾아보았는데 팬트리룸의 케이블만 모아둔 서랍식 수납케이스에서 쉽게 찾아서 교체하고 다시 넣어놓았다. 과거 같으면 안이 보이지 않는 박스 안에서 뒤적여서 한참을 찾았을 텐데. 순간 뿌듯했다. 우리의 기억도 비슷한 것들은 같은 장소에 모아서 쉽게 기억하고 리콜하겠지.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조각모음도 같은 기전으로 최적화를 하는 것일 테고. 집안 정리정돈을 하면서 지혜를 많이 얻었다. 사람은 편하게만 살기보다 힘든 과정을 거쳐야 성장하는 듯하다. 때로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것도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아버지께서 퇴근 후 달라진 방을 보시곤 놀라셨고 흡족해하셨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다가 "너한테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맙다."라고 하셨다. 내가 웃으면서 말씀드렸다. "아버지, 세상에 공짜가 있나요?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해주신 데 대한 보답이잖아요?" 아버지께서는 웃으시며 "잘 먹었다." 하시곤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버지께서 퇴근하시기 전에 몇 번이나 깔끔해진 안방을 보곤 나도 흡족했었다. 내 방의 레이아웃을 변경하고 청소 후 보면서 흡족했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건 특별한 느낌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모습을 보는 행복. 이제 나 자신도 행복해하는 걸 보는 행복을 느껴보자. 내일은 아버지께서 봉직의로 근무하시는 요양병원 연구실의 남은 집기교체를 하는 날이다. 일하시는 방의 환경이 달라지면 또 하나의 행복이 추가되겠지. 덩달아 나도 행복해지고. 변화는 특히 긍정적인 변화는 에너지를 주고 행복하게 만든다. 그 과정이 좀 힘들긴 하지만. 운동도 힘들지만 하고 나면 체력이 좋아지고 공부도 힘들지만 하고 나면 지혜로워지는 것처럼. 그런 것들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무엇보다 아버지께서 건강하게 살아계셔서 챙겨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 이틀 전이 스승의 날이었는데 그날 난 다른 스승이 아닌 아버지와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정성껏 내가 만든 음식을 차려드리면서. 가장 큰 스승은 부모라고 생각한다. 내게 말을 가르쳐주셨고 사랑을 가르쳐주셨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면 안 되는지 가르쳐 주셨다. 물론 부모도 인간인지라 완벽하진 않고 단점도 있지만 그조차도 가르침이다. 오늘 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게도 나 같은 아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물론 나처럼 늦도록 장가도 안 가고 속 썩이면 힘든 면도 있겠지만. 늦어도 결혼은 해서 자녀를 낳아 키우고 싶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사랑을 경험하고 배우고 성장하고 싶다. 인생의 목적이 살며 사랑하며 배우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