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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Sep 30. 2024

섬, 섬

<섬, 섬>  

   

   책을 정리하다가 한순간 나는 한 권의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나는 내 영혼이 저 까마득한 과거의 어느 한 시점으로 빨려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책을 마주하는 짧은 순간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것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따위의 전율을 몰고 오지는 않았다. 대신 아릿하게 가슴을 저미고 들어오는 애틋한 감정을 데리고 왔다. 조용하면서도 쓸쓸하게 밀려드는 파도소리처럼 그런 것이었다. 침묵이 왔고, 명료한 의식이 왔고, 다시는 만질 수 없는 조그만 불빛 하나가 선회하며 사라지는 듯했다. 


   나는 그 책의 바코드를 스캔하고 제 위치에 놓았다. 그리고 다른 책들을 점검하기 위해 손길을 돌리려다 이내 멈췄다. 전혀 상관이 없으면서도 아주 관계가 깊어져버린 내 일상의 무엇처럼 그 책이 나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불빛을, 그래서 이제는 빛의 농도가 빠져나가버린 그 불빛으로부터 그와 같은 착각을 끄집어낼 수 있는 사실이 부당할 테지만 나는 순간 이것을 부인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책을 끄집어내서 점검용 책들과 분리시켰다. 집으로 가져가 읽을 작정이었다.  

   

   저녁을 먹고 집 옆 공원에 산책을 다녀왔다. 영하로 떨어진 밤공기는 차가워서 투명하다. 도시의 밝은 불빛 속에서도 겨울밤하늘에 몇 개의 별들이 너무도 선명하여 정답다. 집에 돌아온 나는 거실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TV의 오락프로를 보며 즐거워하는 동안 식탁으로 갔다. 책을 읽기에는 어쩐지 편한 식탁의자에 앉아 나는 가지고 온 책을 폈다.    

   

   섬. 


   장 그르니에의 섬. 나는 이 책을 언제 읽었던가? 아마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이 책에 관한 서문을 쓴 장 그르니에의 제자 알베르 까뮈 때문이었을까? 나는 알베르 까뮈가 쓴 서문의 첫 구절을 그때 어느 신문지상에서 읽었다. 그 구절은 이랬다. <알제이에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리고 이 문장과 함께 계속된 서문의 마지막 구절 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이제 갓 스무 살의 까뮈를 그토록 간절하게 만든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마도 그러한 까뮈가 부러웠을 것이리라. 스무 살이었던 나도 까뮈처럼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간절하게 읽고 싶도록 만든, 처음 그 몇 줄의 그것들을 읽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때 내게도 항구도시인 목포가 가져다주는 도시 특유의 수많은 고절한 것들, 이를테면 소금. 갯냄새, 쓰레기가 난무하는 부두, 선박이 토해낸 기름띠가 선명하게 선을 긋고 있는 녹색바다, 그곳의 뜨거운 태양, 생선과 구릿빛으로 그을린 인부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오거리와 삼학도, 유달산, 유달산너머로 지는 석양과 달성사의 저녁 종소리.. 이 모든 것이 뱃고동소리처럼 여음을 남기며 가슴에 자국을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길로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장 그르니에는「섬」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이 첫 문장을 읽은 나는 더 이상 읽지를 못했다. 단 한 줄의 문장 앞에서 나는 독자로서의 걸음이 멈추어 서버렸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가 내게 들려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울었던 것 같다. 스무 살 그때 말이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나는 이 한 줄의 문장을 읽다가 과거의 그때처럼 멈추어버렸다. 마치 스무 살 그 시절을 재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불현듯 가슴 가득히 밀려드는 걷잡을 수 없는 우수가 뜻하지 않게 중년의 나를 지배해 버리는 순간 나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식탁의자에 앉아 있다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노라니 이제야 비로소 그의 다음 문장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섬」에 녹아들어 있는 한 줄의 문장을 지나 다음의 문장을 쉼 없이 읽을 수 있으리라. 


   어떤 책이란 이렇게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개인에게 마구잡이로 덤벼들어 오는 경우가 있다. 지난날의 어떤 순간을 끄집어내 보여주는 마술까지 흉내 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대부분의 독자는 이러한 것이 작가와의 개인적 우호관계라는 통로가 형성되는 첫 관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물론 나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러한 독자로서의 보장된 즐거움을 유보해야 할지도 모른다. 보장된 이 즐거움마저 내려두어야 할지 모른다. 솔직히 지금 까뮈가「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는, 그와 같은 열망이, 내 스무 살 그 시절을 불러내서 내 안에 담겼던 그것들, 그 열망을 또다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내 내부에서 그것은 너무 오래도록 잊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면서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불빛이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는 연륜과 함께 흰 눈발처럼 쌓인 정제된 불이 하나, 빛을 밝히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장 그르니에가 내 젊은 날에 주었던 통로, 까뮈가 내게 주었던 그 우호적인 통로에서 조금은, 아니 어쩌면 많이 비껴 나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겨울밤하늘에 또렷이 빛나는 별들처럼 새롭게 농축된 내 가슴의 불빛을 나는 바라본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새롭게 천천히 「섬」을 읽어갈 것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스무날 그 시절의 열망을 정말로 정제해 보여주는 이 시간 속에, 잠시라도 머무를 수 있다면, 아주 아주 천천히 읽어갈 것이다. 

 

- 모년의 1.22. 밤에 레인메이커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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