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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Sep 26. 2023

몽골에 왔으면 등산은 필수지

내가배고픈것을보지못하는사람들#1

처음으로 가게 된 안나의 집에서

 이번에도 역시 저녁 기차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컵라면을 들고 탔다는 점이었다. 컵라면! 기차를 타게 된다면 무조건 가지고 가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 기차를 탔을 때 저녁 늦은 시간이 되니 다들 어디선가 부스럭부스럭 컵라면을 꺼내 들고 먹기 시작하더라. 그게 어찌나 부럽던지.

 몽골 기차 한쪽에 있는 화로로 가서 바로 물을 받았다. 손안에 뜨끈한 기운이 퍼지기 전에 서둘러 칸 안으로 들어와 내려놨다. 그런데 그제야 우리가 간과한 사실을 깨달은 거다.


“아 미친… 어떻게 먹지??”


 몽골은 신라면 컵라면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는데 한국과는 달리 컵라면 안에 접이식 포크가 있었다. 그래서 굳이 나무젓가락을 챙기지 않아도 포크로 먹을 수 있었는데 나는 신라면보다는 진라면 파라 진라면만 두 개 산 거다. 당연하지만 우리에게 나무젓가락은 없었고, 나는 안나에게 한 번 역무원 분께 여쭤봐달라고 물어봤다.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하기를 대략 5분, 안나가 돌아왔다. 네 개의 얇은 플라스틱 티스푼과 함께.

 플라스틱이면 그래도 괜찮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티스푼은 정말 대량으로 생산된, 단 몇 번 정도만 사용하고 버려질 용도의 티스푼이기 때문에 굉장히 말랑하고 잘 휘어졌다.


“한국인이니까 잘 젓가락질해보래.”


 편견입니다!라고 말하기에는 뭐 어떻겠는가. 그래도 티스푼이라도 쥐어준 승무원 분께 감사하다고 해야지. 나는 결국 양손으로 각각 하나씩 티스푼을 잡은 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열심히 몇 가닥씩 집어 먹었다. 그리고는 컵라면을 들어서 국물을 마시며, 이렇게 먹어도 맛있는 라면이라는 엄청난 음식에 감탄하다 앞을 봐버렸다.


 명색의 한국인이라는 자가 티스푼을 양손으로 들어 마치 무언가를 건져먹듯 아슬아슬하게 먹고 있는데 일단은 몽골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안나는 태연하게 티스푼 두 개를 한 손으로 잡고 후루룩 후루룩 컵라면을 먹고 있는 거다. 대체 누가 한국인인 건지. 뒤늦게 그걸 발견한 나 역시 안나를 따라 하려고 했으나 이미 많은 면을 건져 먹은 상태였고 굳이 방식을 바꾸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변명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저건 안나가 잘한 거다. 흐물흐물한 티스푼으로 어떻게 저렇게 먹은 건지 진짜 신기하다.


 그렇게 맛있는 라면도 먹고 양치질도 하고 잠도 자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목적지, 어느새 너무 친숙해 버린 이곳, 울란바토르로 도착했다. 우리는 오전에 도착했는데 세상에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그 좁은 주차장 안에 사람도 그득그득 차도 그득그득한데 그렇다고 차가 질서 정연하게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갈 수 있을까 심각한 고민을 했지만 곧이어 갓안나님께서, 정확히는 안나의 사촌오빠의 아내(그냥 언니라고 하지만 나를 위해 설명해 줬다)분이 차로 우리를 데리러 와주셔 안도를 느꼈다. 무거운 짐을 트렁크에 싣고 편안하게 앉아있으려니 언니가 나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안녕! 시골은 어땠어?”


 어땠냐니 끝내줬지! 나는 그 말을 최대한 쉬운 한국어로 풀어내려 노력했다. 언니는 한국어를 할 줄 알았지만 그렇다고 안나처럼 내가 한국인을 대하듯 평소 속도로 아무렇게나 말한다고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어 능력자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편안하게 도착한 안나의 집. 나는 도착하자마자 마당을 눈으로 훑었다. 바로 저기 있었구나! 안나가 자신의 집마당에서 농구를 하자고 했을 때부터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농구골대가 노란 벽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물론 내가 바로 거기서 농구를 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이 날 저녁 농구를 하기는 했다. 안나의 사촌동생들과 함께 농구를 했는데 여기서 또 한 번 몽골인들의 튼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안나네 집 마당은 콘크리트였는데 당연하지만 홈 하나 없는 매끄러운 콘크리트가 아니기 때문에 뛰면서도 항상 몸에 긴장을 한 상태여야 했다. 넘어지면 끝장인 건 당연지사, 오른쪽에 엄청 큰 도랑이나 다름없는 홈이 있었는데 한 번은 그쪽에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발이 순간적으로 꺾여 굉장히 무서웠다. 여기서 발목이 꺾이면 농구는 물론이거니와 여행도 못하지 않는가! 몽골여행인데!

 안나의 사촌동생들은 키가 컸는데, 안나와 1대1을 하면서도 거의 봐주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래서 안나가 강해진 건가? 적어도 안나가 왜 3점 슛을 그렇게 잘 던지는지는 알았다. 그렇게 큰 사람을 상대하려면 밖에서 싸우는 게 제일이니까.


으앙 귀여워


 오늘은 그렇게 안나가 보고 싶다고 말했던 안나의 조카와 나들이를 했다. 집 밖으로 나간 건 아니고, 집의 뒷마당에 있는 정원에서 한가롭게 바람을 맞은 것뿐이지만 담벼락 위로 빼꼼 솟아오른 구름이 있어서일까 나도 그냥 벤치에 앉아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참고로 이 아이, 너무 보고 싶다.


만두(보오즈)와 삼겹꼬치


 사실 처음으로 친구집으로 간 거고 대가족이 여러 집에 함께 살고 있다 보니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나를 반기고 있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굳이 나에게 이리저리 말을 걸지 않으면서도 재밌어 보이는 활동을 하면 부른다던가 한국어로 말을 건다던가, 내가 어물쩡거리고 있으면 벤치를 가지고 와 묵묵히 놓아준다던가 하는 걸 보면서 짧은 시간에 이곳에 녹아들어 갔다.

 저녁 시간이 되자마자 안나 아버지께서 직접 만든 만두를 내어주셨다. 보오즈,라고 하는 이 찐만두는 안에 양고기가 들어가 있었는데 갓 찐 거라 그런지 정말 맛있었다. 나는 이게 내 저녁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었는데...


 "이따가 오빠가 꼬치구이 해준대."


 내 앞에서 같이 만두를 먹고 있던 안나가 툭, 내뱉은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방금 우리 몇 개의 만두를 먹었는지 알고 있니? 심지어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도착하자마자 안나 어머니께서 직접 만드신 수테차와 빵도 먹은 우리였다.


 그래도 뭐, 맛있는 걸 만들어준다는데. 만두를 먹고 사촌동생들과 2대2 농구를 하던 우리는 솔솔 풍기는 냄새에 이끌려 창고 쪽으로 가 꼬치구이를 맛있게 먹었다. 이때 나는 깨달았어야 했다. 이곳이 얼마나 나에게 맛있는 것을 잔뜩 줄 것인지를.



네 친구는 우리 친구고 우리 친구는 네 친구

 저녁도 먹었으니 이제 잘까, 싶었는데 안나가 친구들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정확히는 친구의 친구가 술집을 열었는데 구경차 간다는 거다. 우리는 놀러 간다는 사실에 신난 사촌동생들을 태우고 친구들을 만나러 출발했다.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달되지 않아 한참 빙글빙글 돌며 도로 위를 배회해야 했는데 그러는 내내 사촌들이 신나는 노래를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며 몸을 흔들었다. 물론 나는 그러지 않았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러다 한 어린 동생이 너무나도 신이 난 나머지 차를 뚫을 기새로 몸을 들썩이며 소리를 질렀다.


 "What??"


 변명하자면 나는 앞 좌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소리가 조금 컸다고 느껴졌고, 그래서 그냥 소리를 아주 조금 줄였을 뿐이었다. 진짜 조금. 정말 우연의 일치로 사촌 동생이 소리친 내용은 "소리 높여줘!!" 였다는 것이 문제지만. 내가 소리를 줄이자마자 차 안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웃겼을까. 소리 높여달라고 했는데 바로 소리를 줄여버렸으니.



 그렇게 한참 배회하다 도착한 곳은 작은 노란색 건물과 여러 간이 테이블, 의자가 있는 광장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이전에 들어가려고 시도했다가 입구를 못 찾아서 겉만을 훑어본 복드 칸 궁전 박물관의 광장이었는데 밤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나는 그곳에서 이전에 만난 너밍, 서코, 어요카와 함께 다른 친구들을 만났다. 이미 많은 친구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고 나는 어요카와 함께 나눠서 의자에 앉았다. 바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친구들이 있기 때문인지 사촌동생들을 그냥 주위를 산책한다며 다른 곳으로 떠났다. 


 사진 속에 있는 노란 건물은 친구들의 친구, 그리고 그 친구들이 다 함께 만든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작은 카페와 바를 운영하기 위해 박물관과 협의해서 지었다고 하는데, 그 과정을 사진으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뼈대부터 페인트칠까지 손수 했더라.

 이 멋진 친구는 우리에게 서비스라며 닭다리를 내놨다. 그런데 이 친구들, 정말 따뜻하다. 이전에도 한 번 먹었다지만 또 내놓은 두 개의 닭다리 중 무려 하나의 닭다리를 나에게 내어주었다. "Sky~"하면서 나에게 그 큼직한 닭다리 하나를 주는데 나는 이미 감동의 도가니. 말이 잘 통하지 않으면 어떠한가. 이렇게 친절하게 닭다리를 챙겨주는데! 이곳에 오기 전에 빵과 만두와 꼬치구이를 먹었다는 사실은 이미 잊었다.

 

 "둘 중 하나야. 저기서 봉춤을 추거나 저기에 있는 남자애와 키스를 하고 와!"


 그놈의 게임. 물론 이건 내가 걸린 건 아니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Do or Ask라는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는 게임에서 오직 Ask 한 번이 걸렸다. 그러나 상의를 벗고 이곳 한 바퀴를 배회하라던가 가운데로 뛰어들어가 몽골어로 '나는 몽골인이에요~'를 외치라는 등의 벌칙을 수행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몽골의 무서움을 느꼈다. 비가 옴에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건 덤일지도. 나만 혼자 비 온다고 난리 쳤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는 친구의 친구이고~



몽골인들이 술 마신 다음날에 먹는 것은?

 안나가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슬프게도 나는 전날에 술을 마시면 마시지 않을 때보다 일찍 일어나는 편인데 안나의 기상을 기다리며 침대 위에서 잠시 혼자 놀다가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1층으로 내려왔다.

 이미 일어나 계셨던 안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오빠가 나를 향해 인사했다.


 "잘 잤어?"


 물론 이건 한국말을 배운 적이 있는 오빠의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몽골어로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안녕히 주무셨어요.'를 'Good morning'이라는 언어로 바꾸어 말했다. 따스하게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TV에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따뜻한 수테차를 내어주시고 아버지는 나를 배려하신 건지 채널을 한인채널로 돌려주셨다. 



그런데 세상에, 선우정아라니. 어떻게 한국에 와서 처음 본 한인채널에 선우정아가 나올 수 있지? 이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에 놓인 우유차로 내 두 손을 데우며 선우정아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감상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감상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어머니께서 나에게 아침밥을 주셨다. 근데 이게 뭐지...? 죽인지 국물인지 모르겠는 모습에 음식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내 모습이 웃겼던 건지 오빠분이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이거 알아? 반탄. 술 마신 다음날에 먹는 거야."


 우리가 얼마나 늦게 들어왔는지 다들 아셨나 보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반탄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그리고 직감했다. 아마 여기서 먹은 것 중 반탄이 세 손가락 안에 꼽힐 거라고. 반탄은 밀가루로 만든 죽인데, 가볍게 만들 수 있어서 몽골인들이 자주 해 먹는 음식이라고 했다. 물론 내가 고기죽 자체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반탄은 정말 맛있었다. 오죽하면 내가 눈치를 보며 몇 번 더 달라고 했겠는가. 뭐 먹을래? 하면 반탄을 외칠 정도로 이 반탄이라는 밀가루 죽은 몽골에서 내 최애 음식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만족스럽게 반탄을 먹고 있자니 안나가 부스스한 상태로 내려왔다. 나는 마저 반탄을 해치우고 아버지께서 주신 내장만두를 먹으면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상당히 편해 보였나 보다. 사실, 순식간에 편해지긴 했다.


 "우리 나갈 준비하자."


 양치질을 끝내고 상쾌해진 상태로 안나의 방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를 몇십 분, 안나가 방으로 돌아오며 나에게 말했다.


  "...? 우리 어디 가?"

 "응... 몰라. 어디 간다는데? 준비하래."

 "엉?? 모른다고?"


 모른단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해봤자 옷은 입고 있는 걸로 충분하고 패딩과 씻을 용품, 카메라와 삼각대뿐이었지만.



멧돼지가 돌아다니는 야생 사원

 뭐든 먹을 것이 있으면 장땡이라고 하던가. 큰 슈퍼에 들려 이것저것 쇼핑을 하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내가 한 것이라고는 카트를 끌며 어머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저거 맛있어 보여요!'라고 몸으로 표현한 것밖에는 없지만. 덕분에 몽골인이 여행을 갈 때 어떤 음식들을 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나를 위해 컵라면을 사주셨지만 그것 말고는 내가 살면서 사본 적이 없던 음식들이었다. 생선통조림이라던가 딱딱한 빵이라던가 그런 것들.



 어딜 가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차에 몸을 싣고 아까 산 빵을 냠냠거렸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3분의 1 정도 해치웠는데 풍경이 예쁘니 빵도 평소보다 훨씬 맛있더라. 이런저런 상상도 했다. 어딜 가는 걸까? 이전에 별을 보러 간다고 했으니 별 보러 가는 걸 수도 있고 아버지의 친구분의 집에 가는 걸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르는 근처 지역을 가는 걸 수도 있겠다. 중간중간 데이터가 터질 때마다 지도 앱으로 확인해 보니 울란바토르의 위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다르항이나 에르데네트는 아닐 테고.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내가 다시 한번 안나에게 이제는 어디로 가는 건지 아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안나가 앱으로 위치를 쳐줬다.


아하, 수도원에 가는구나!

안나 아버지의 친구분이 수도원에서 일을 하시는 건가? 나는 왜 그런 생각들을 했던 건지. 수도원에 간 이유! 그건 바로 그냥 우리를 데리고 놀러 간 거였다.


2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수도원은, 수도원이라기보다는 절에 가까웠다. 그보다 어디를 갔다고 제대로 말해주고 싶은데 아무리 안나에게 가르침을 받아도 저 긴 문장을 매끄럽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한국어로 번역해 달라고 해도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대충, 울란바토르 근처에 있는 유명한 사원에 갔다고 말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차에서 내리고 나니 가장 먼저 내 눈에 보이는 것, 멧돼지. 차 안에서 봤을 때는 당연히 지나가던 개라고 생각했던 나는 내리자마자 그 엄청난 크기와 압도적인 비주얼, 그리고 나에게 점점 다가오는 그것의 거침없음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안나 아버지께서 멧돼지를 발로 미셨다. 세상에. 화난 멧돼지가 아버지를 들이받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도 멧돼지는 코를 몇 번 들썩일 뿐 화난 기색 따위는 없었다. 그리 사나운 멧돼지는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래도 멧돼지를 발로 밀다니,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에 나는 안나 아버지의 뒤로 슬금슬금 숨었다.

 그렇게 멧돼지를 지나쳐 사원으로 가는 길을 가자니 주위에 멧돼지들이 보였다. 아, 여기는 정말 멧돼지들과 함께 사는 곳이구나. 



 심지어 사원 앞에서도 태연하게 돌아다녔다. 그냥 개여도 이 정도 크기면 흠칫하는데 멧돼지는 어떻겠는가. 멧돼지는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괜히 나 혼자 멧돼지를 가운데 두고 빙빙 돌아 길을 지나갔다. 참고로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멧돼지가 있거나 말거나 그냥 신발을 신고 나갔고 방해가 된다 싶으면 슬쩍 밀기도 했다. 강인한 몽골인에 대한 내 생각이 한층 더 두터워지는 순간들이었다.



 여기서 잠깐 이 사원의 화장실에 대해 말해보자면, 한참을 차를 타고 달리느라 화장실이 가고 싶었던 안나와 나는 서둘러 아래쪽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 여기 화장실을 찍으려고 했는데 제발 찍지 말아 달라는 안나의 부탁을 착실하게 잘 들어준 나는 앞으로 가자마자 느껴지는 강렬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먼저 들어가 보겠다는 안나. 그리고 안나는 나오자마자 내 눈치를 살피며 "너 여기 못 쓸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그러니 내가 안 들어가 볼 수 있겠는가. 휴지를 받아 들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 쉰 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까,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생각보다는. 아마 옛날 푸세식처럼 뻥 뚫린 가운데로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이 시커멓게 자리 잡고 있어서 내가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닥이 너무 가까워서 똥파리들이 내 주위에서 윙윙거리고 있는 것보다는 이것이 훨씬 나았다.


 안나의 부모님은 사원 쪽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셨다. 나와 안나는 산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겠다고 말하고 길을 떠났다. 정확히는 등산을 시작했다. 곳곳에 여러 불상이나 그림들이 있었고 이것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려주는 팻말도 많았지만 몽골어를 읽을 수 없었던 간혹 그 아래에 쓰여있는 영어를 읽으면서 걸었다. 몽골인들은 불교인이 많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은 몽골인, 그리고 간혹 유럽/미국계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 번도 한국어를 들은 적이 없다는 건 조금 아쉬웠다. 하긴 누가 몽골에 와서 울란바토르에서 2시간은 차를 타고 가야 있는 사원을 가겠는가.



 안나가 열심히 팻말에 적혀 있는 문구들을 읽는 동안 나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잘 찍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행을 더 즐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샀던 카메라를 썩히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억울하지만, 핸드폰으로 찍으면 보정이 되어서 그런가 더 예쁘게 나오는 것 같았다. 젠장. 역시 카메라는 단렌즈를 사서 가까운 것들을 아름답게 찍는 연습부터 해야 되나 보다.


 이러나저러나 몽골 산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한국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어?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지만 타국으로 여행을 와 하는 등산은 감회가 조금 새롭달까. 더군다나 몽골의 여름은 그늘만 있다면 무조건 시원해지는 건조한 기후이기 때문에 등산을 하면서도 그늘 안에만 있다면 더운 것을 거의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반대로 말하면 햇볕에 서는 순간 죽는다는 거다)

 우리는 앞서 가던 몽골인 가족들의 조언대로 아주 작은 바위의 틈새로 들어가기도 했다.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이곳에 오는 많은 방문객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하기 위해 꼭 하는 행위라고 했다. 나는 뒤에 가방을 메고 있었고 목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행동이 매우 어려웠는데 새 출발을 할 때 많은 것을 가지고 가려고 해 고난이 예상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아무튼 성공하긴 했으니 나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인간인 거다. 


사람들이 모여 있던 포토스팟에서 여행작가 놀이


 1시간 정도를 소모했을까, 중간에 사실 우리가 반대로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위험해 보이는 미끄러운 구간을 지나 사원의 뒤쪽으로 돌아 나오니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사원 안에도 들어가 보라고 손짓했고 나는 잠시 짐을 맡기고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참고로 나는 그때까지도 이곳에서 1박을 한다고 생각해 조금도 쓰지 않는 짐을 바리바리 챙겨 등산을 했었다.



 불교는 불교다. 몽골의 사원이라고 해서 한국의 사원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불교를 잘 몰라서 세세한 디테일을 놓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그랬다. 나는 안나를 따라 몽골식으로 절을 하고 사원 안에 있는 여러 불상들을 구경하고 나왔다. 종교에는 그다지 감명을 받지 않기 때문일까, 나에게는 내가 나오자마자 바로 옆에 있었던 커다란 멧돼지가 훨씬 더 기억에 남는다.



 "이제 밥 먹자!"


 지나가다 본 잔디밭에 큰 담요들을 깔고 앉아서 피크닉을 즐기기. 뭐 이 정도는 한국에서도 아주 가끔 했던 일이고 보기는 더 많이 봤으니 익숙했다. 그렇지만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빵 위에 생선 통조림을 얹어 먹는 것은 매우 생소했다. 몽골에 와서 간식거리류 말고는 잘 먹었던 나지만 아무래도 이건 썩 당기지 않더라. 안나가 열심히 빵 위에 큰 멸치들을 얹은 다음 나에게 주길래 내가 하나씩 먹겠다고 하자 안나가 말했다.


 "아빠가 너 챙겨주라고 해서 한 건데...!"


 아이고, 미안하다. 먹을 거냐고 물어보지 그랬니. 아무리 그래도 그 많은 멸치들을 빵과 함께 다 먹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네가 먹으면 안 되냐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물론 안나는 먹어줬다.



 결국 나는 호기심 반 예의 반으로 놓여 있는 3가지 통조림을 모두 한 번씩 시도해 보고는 식사를 마무리했다. 결론은, 다시는 통조림 생선을 먹지 않겠다는 거였다. 맛이 그렇게 최악이었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굳이 배를 채울 용도로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하루가 마무리되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컵라면을 먹기 위해 근처에 있는 게르, 정확히는 음식점을 들려 뜨거운 물을 얻고 라면을 먹을 때까지. 안나랑 같이 비밀산책도 하고 너무 아름다웠던 풍경도 찍고 살짝 물을 많이 부어 싱거운 몽골 도시락 라면도 먹고 다시 차에 탔다. 이제 집으로 가겠구나. 집으로 돌아가면 일단 씻고 싶다.


 "우리 이모집 간다고 하는데?"

 "넹?"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린 그대로 울란바토르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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