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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나로 Dec 12. 2023

괴물   

괴물은 누구인가

괴물은 누구인가.

영화 안에서 반복해서 묻는다. 나쁜 놈이 대체 누구야?


어느 한 사람, 혹은 특정된 사람들의 가해자와 일방적인 피해자가 있다고 우리는 쉽게 가정한다. 이야기의 구도는 선과 악의 대결이 가장 쉽고 재미있고 나쁜 놈을 응징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영화가 끝날 때쯤에서야 이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기대였는지 알게 된다. 


가해자가 없는 폭력의 희생자들만이 있음을, 그리고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들이 우리가 될 수 있음에 대한 비극이 아픈데 영화는 아름답다.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맹목적성,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폭력이 일반의 삶을 어떻게 장악하고 있으며 그 그물에 갇혀서 어떻게 꼼짝 못 하고 있는지 천천히 각자의 시점을 따라서 보여준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그들이 우리라는 것으로 연결하게 되면 이 영화는 호러다. 아름다운 호러... 그래서 우리는 이 호러 같은 현실 속에 살고 있음을 알게 한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문명이 가져다준 비극, 또는 지금의 사회적 현실이 가져다주는 허구가 삶 전체에 촘촘하게 엮여 있어서 거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지배논리에 함몰되어 가는 대상은 채 성장하지 못한 소년들이다.


 작동하는 시스템에 휘둘려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닫힌 구조의 피폐한 현실 안에서 아직 닫히지 않은 소년들이 제일 허약하다. 아들이 이상해지는 이유를 찾아서 떠도는 엄마, 아마 그녀는 계속 모를지도 모른다.     

남편이 애인과 여행 가다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죽음은 애도하지만 남편의 애인은 없었던 듯 삭제해 버렸다. 삭제되고 은폐된 진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답답함, 진실을 왜곡해서라도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명제 아래 소년은 거짓말하는 것을 선택한다. 



타인을 가족을 또는 자신을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지만 그 상처는 고스란히 소년의 내면으로 향한다.


학급에서 따돌림을 당하면서 웃는 또 다른 소년과 친하다는 것도 그리고 그 소년을 사랑하게 된 것도 모두 비밀이다.  그것을 들키는 순간 애써서 유지해 오고 있는 균형이 무너지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행복이 무너진다.


모두가 전체를 말하지 않는다. 일부만을 이야기하고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만만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고 모든 악의를 던지고 덮어버린다. 어느 날 갑자기 욕받이 무녀가 된 젊은 교사, 그리고 소년의 어머니만이 진실을 찾으러 고군분투하지만 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둠을 간파하기에 젊은 교사는 아직 몸만 큰 소년 같았고, 소년의 엄마는 이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없는 듯 지워버렸다. 


영화는 각자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되돌리면서 그 누구도 괴물이 아니거나 모두가 괴물이라고 하는 것 같다. 


소년들의 마음과 어른들, 혹은 사회 사이의 간극은 넓고 깊어서, 화해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을 수 없거나, 두 세계를 오고 갈 건널목이 없다. 사랑은 위선이 될 것이고 건널목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무엇을 비밀로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는 그것으로 어떻게 자신을 상처 입히고 남을 배제해 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지금,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행복하다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다. 많은 것들이 자동으로 돌아가고 클릭 한 번이면 진수성찬으로 밥까지 날라다 주지만 그 밥을 먹으면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풍요롭지만 허기진 결핍으로 계속 끌어당기지만 나의 뱃속에 들어가는 양은 정해져 있으니 그 수많은 먹방으로 대신해서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인 허기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어딘가 불편한데 그 불편함을 이야기할 수 없고 내가 불편한지 안 한 지도 구분되지 않은 채 같은 챗바퀴를 돌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님의 시, 그날 중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왠지 오래전에 읽었던 이 시가 생각났다. 그날 처음 읽었을 때도 가슴을 때리며 지나간 구절인데 그 당시는 나만 아픈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위안이었다.

문득 기억나 다시 꺼내본 지금은 병들었음에 대한 자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 세월사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변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프지 않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얼마나 허위의식에 찌들어 있으며 삶에 속고 있는지 나에게 강요된 그 어떤 것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한 채 살고 있는지 깨어나지 않으려 한다면 내 안의 소년들과 같은 순수는 잠들어 버리고 "라떼는 말이야"를 연발하면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다름과 차이가 은폐되고 욕망이 거세되면서 타인에 대한 폭력의 힘으로 작동한다. 나는 언제 어떻게 그러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하는데 당연하게 살면서 받아들인 것들을 다시 탈탈 털어내는 것이 쉬운 일일까 싶다. 


이렇게 변명하고 툴툴거리는 나도 있지만 그럼에도 한 발짝씩 나가고 있다. 느리지만 느려야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천천히...  나에게 속도도 중독이다. 

      

그동안 빠르게 해야만 한다는 근거 없는 신념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거르고 왔는지 알지 못할 일이다. 이렇게 놓쳐버린 것들을 예전에는 사소하고 의미 없는 것으로 한편에 밀어 두고 잊어버렸는데 이것이 은폐이고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을 거르는 것, 이것이 의식이 행사해 온 거대한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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