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하며 스피노자를 생각하다

역시 몇 년 전에 다른 곳에 썼던 글 옮김

by 지혜를 캐는 서연

사실 많은 가사 일 중 정말 싫어하는 것이 설거지이다.

모든 식기 수저 등을 일회용으로 할 경우 그 환경오염은 어마어마할 거라 감히 그런 상상을 하긴 두렵지만, 왜 아까 먹었던 그릇을 또 씻고 씻어 계속 이렇게 활용하는 시스템이 생겼을까.


예전에 세계사를 배울 때 왜 '빗살무늬토기'라든지 그런 그릇들이 하필 시대를 가르는 지표가 되었을까 하는 점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느낌인 게,

'그릇'을 가지고 그 그릇을 씻어 계속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착'의 다른 이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정착한 인류이고, 그런 이상 그릇 등 일상용품들을 계속 씻고 다듬어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게 필수적이고, 그를 위해 설거지, 청소, 빨래 등의 가사노동이 필요하게 된 것인 것 같고, 그것이 정착된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살림'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청소에 관한 청소기의 도움, 빨래에 관한 세탁기의 도움이 있고, 설거지에도 식기세척기의 도움이 있지만, 이건 특히나 먹는 것, 눈에 보이게 입에 직접 들어가는 것이라 어쩐지 식기세척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자꾸 의심이 든다. 애벌로 그릇을 씻어 식기세척기에 넣으면서도, 일단 식기세척기의 시스템상 '컵씻이'는 제대로 될 것 같지 않다는 의심 때문에, 결국은 손목에 힘을 주면서 컵의 오목한 부분을 힘주어 손으로 설거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참 번거롭게 싫었는데(손목도 아프고), 그렇게 아까 먹었던 식기들을 씻고 컵들을 씻으면서, 사회와 회사에서 여러 복잡한 일이 있고, 내 순간적인 마음상태가 어떻더라도,

다음 끼 우리 가족들이 먹는 데 쓸 식기를 씻는다는 것은,

스피노자가 얘기했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다시 그릇을 씻고, 밥을 하고, 생명을 키우는 일이 결국 묵묵히, 사과나무를 심는 철학자의 자세인 것 같다.

그래서 할머니들의 주름진 손들을 보면, 저 손으로 얼마나 여러 번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그래서 생명들을 키웠을까 하는 생각에 숙연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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