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언어에 속다
아파트를 고가로 사거나 분양을 받아서 빚쟁이가 된 사연을 요즘 종종 듣게 된다. 지금 못 들어가면 강남 입성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말에 이끌려 엄청난 빚을 내어 구입한 아파트가 수억이 떨어졌다는 기막힌 이야기도 들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언젠가는 아파트값이 상승하리라는 기대를 안고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가 팽창했던 예전처럼 아파트값이 오르지 않는다면 그들은 미래 소득까지 갈취를 당한 것이다. 부동산 공부를 많이 해서 투자에 자신이 있다고 말하던 젊은이가 한숨을 쉬는 것도 보았다. 그가 했다는 공부는 관계자들이 얼마간의 부동산 관련 전문 용어와 경제 용어를 섞어서 의도적으로 엮어 놓은 문서나 서적을 학교 공부처럼 글자로 익힌 것이지 진짜 공부가 아니었을 것이다. 언론사들은 부동산 선동극에 앞장을 섰고 지금도 그런 일을 지속하고 있다. 그들은 이백충, 삼백충, 빌거, 휴거, 벼락거지, 월거지, 전거지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 낚시용 미끼처럼 퍼뜨리기도 했다. 교수라는 사람들도 뒷돈을 받고 심하게 교묘한 언어로 부동산 투기를 부추겼다.
내가 언어의 역기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교과서에서 배운 글과 실제가 다르다고 느꼈을 때였다. 국어 교과서에 다보탑과 석가탑의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을 화려한 문체로 그려낸 수필이 실려 있었다. 시험공부를 하면서 자습서에 나와 있는 보충 설명까지 암기를 했다. 그런데 막상 내 눈으로 직접 다보탑과 석가탑을 보게 되었을 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눈을 씻고 보아도 교과서에서 작가가 온갖 미사여구로 예찬했던 그런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아직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그 탑을 만든 이의 재능과 수고로움, 오랜 세월을 견뎌낸 탑의 견고함에 찬탄이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교과서에서 작가가 묘사한 탑을 나는 볼 수가 없었다. 나에게 문화재를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럴 거야, 하면서 자책하기도 하고, 미적 감각이 떨어지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기도 했지만 작가의 언어에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봄날 등산을 갔을 때였다. 고요한 산길이 기막히게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풍경을 몇 마디 적어서 카톡에 올렸는데 그 글을 보고 그 산을 다녀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기대와 다른 모습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들에게 미안했다. 젊은 날부터 말솜씨가 좋다는 평을 가끔 들었다. 그런데 내가 쓰고 있는 현란한 언어가 독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언어의 위험성을 뒤늦게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장신구를 착용해 본 적이 없고 집에도 장식품이 없다. 언어 사용에서도 정확한 표현에는 신경을 쓰지만 아름다운 언어나 문학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데에는 소질도 없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내 언어가 일으키는 파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언어로 인간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어려운 학문도 쉬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언어의 모호함에 함축이나 암시로 해석해서 미적 가치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어 역시 불완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일부러 거짓말을 하거나 광고용이나 선동용으로 쓰는 언어가 아니더라도 의도하지 않았던 환상이나 감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이 개개인에게 다가갔을 때 각자 다르게 해석되고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한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짧은 동화책에서도 어머어마한 내용을 읽어냈다. 행간을 읽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언어의 부정확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한때 언어 만능주의에 빠졌던 내가 언어를 의심하고 두려워하게 되면서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언어로 의식을 확장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언어에 의해 장애를 겪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수다스러운 내 언어에 내가 걸려서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사실을 매우 늦게 알게 되었다. 성당에서 침묵 피정을 갔을 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며 말을 중요하게 여겼던 개신교 교회와 사뭇 다른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불교에서 상당히 다른 시각으로 언어를 바라보는 것에 크게 놀랐다. 언어를 기피하기도 하고 언어를 타파하고 해체하는 작업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언어를 떠나서는 진리를 드러낼 수 없지만 언어에 걸려들면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자를 떠나지도 않지만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말에 끌려가지 않고 말이 나온 의도와 근원을 살펴야 말에 속거나 말에 놀아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때로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기도 한다고 했다. 언어가 곧 진리는 아니다. 언어 역시 인간이 이용하는 무수히 많은 도구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언어 역시 흰 것과 검은 것, 양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