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를 닮은 연갈색 트렌치코트 옷깃에 빛바랜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보도블록에 밟히고 발등을 스치는 수북한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주소 잃은 엽서마냥 길거리를 헤맨다.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쉼 없이 광합성을 해온 그녀이지만, 양분을 채우기 위해 종횡무진하는 과정에서 주소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잎맥에 흐르는 맥박을 짚으며 피부에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눈을 감고 응시했다.
그녀를 닮은 단정한 단화는 어느새 플라타너스 군락을 지나 대리석을 밟기 시작했다. 단화에 묻은 나뭇잎의 파편을 털고 문을 지나면 미지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단화의 굽이 호텔에 들어서기 위해 카펫 위에서 작은 탭댄스를 리드미컬하게 수행하자, 회전문이 그녀 앞을 느리게 돌고 있었다. 한 번도 연주해보지 못한 악보를 만나는 기분으로 그녀는 차분히 회전문을 향해 발을 떼었다.
카운터에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친히 앞장서 길을 터주었다. 그녀 뒤로 보이는 구석진 창가에 한 남자의 실루엣이 의자 위에서 조용히 일렁인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네 반갑습니다.”
그녀는 인사에 화답했다.
남자가 읽던 책이 올라간 테이블 사이로 남녀의 실루엣이 통유리창을 통해 투사된다. 그 사이로 갈색이 된 이파리들이 나무와 헤어질 준비를 하며 저속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올라간 낡은 책표지를 보며 그녀가 말을 걸었다.
“책을 참 좋아하시나 봅니다.”
“네, 대학생 때는 제법 좋아했습니다. 직장에 다니다 보니 꾸준히 읽기가 어렵더라고요.”
“저도 근래에는 일이 바빠 잘 읽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게 좋아하던 나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좀 묘합니다.”
그러자 남자는 단정한 소매로 둘러싸인 손으로 커피스푼을 저으면서 말했다.
“제가 커피를 정말 좋아하는데, 직장에 다니다 보니 시간이 안 돼서 주로회사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마시고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해도, 저는 절 커피 애호가라 생각합니다. 당신도 비슷한 경우라감히 생각드네요.”
호텔 커피숍 밖에서 플라타너스는 주소를 잃고 여전히 바닥을 헤매고 있다. 조금씩 닳아가는 플라타너스라도, 같은 뿌리의 기억을 공유한 잎을 바람결에 만날 수도 있기 마련이다. 여름에는 몰랐던 한여름의 꿈을 두 플라타너스 잎은 오늘에서야 선명하게 경험한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볕뉘가 반짝거린다, 인생이 찰나라고 하지만 삶 속에서 적지 않는 부딪힘이 바삭한 가을볕에도 그을러 탄내가 나곤 했었다. 하지만 청명한 가을빛 아래 마주한 엷은 미소 하나는, 세월에 부단히 쓸려가는 돛단배가 오늘의 미세한 떨림에 뒤집힐까 두려운 마음을 깨주기에 충분했다.
어느새해 질 녘이 다가와 정원 풍경이 물감 묻은 팔레트처럼 알록달록해졌다. 서로의목소리에 집중하느라 귀처럼 상체도 점점 앞으로 기울어졌다.
“저는 말이죠, 가을에 소풍가는 사람들 마음도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남자가 말한 의외의 말에 여자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셨군요. 왜요?”
“그냥... 가을에는 모든 것과 헤어져야 하잖아요. 철새들도 살았던 곳을 떠나야 하고, 나무도 잎과 헤어져 긴 겨울을 버텨야 하고, 저 역시도...”
접혀진상흔의 언어를 말없이 바라보다그녀의 시선은 잠시 창밖을 향했다. 단풍잎이 석양을 맞아 붉게 타고 있었다.
“오늘 여기까지 걸어오는데 날씨가 더없이 좋았어요. 가을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풍경일 뿐인데도, 낙엽처럼 떨어질 미래가 상상되면 괜히 음울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오늘하루당신을 만나기까지 날씨가 참 좋았던 건, 겨울이 오기 전 봄을 예비해주는 것이었을까요...”
남자도 잠시 창밖을 바라보곤 대답했다.
“그러게요. 이가을이 없었다면단풍이 저리 붉게 빛날 수도없었겠네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돌담길을 걷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낙엽을 닮은 연갈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녀의 옷깃에 전등의 작은 전류가 튀어 오른다. 길거리를구르던 플라타너스 이파리도 이번에는 다를 거란 찰나 같은 유의미를 되뇌며 하늘로 날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