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얼어붙은 흙이 초록으로 녹아 흘러, 집 앞 전답의 고랑과 이랑에 뜨거운 김들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넓지 않은 전답에도 헐벗은 나뭇가지에 새순은 움트고, 두툼한 햇살은 대완이 나서는 방 두 칸짜리 초가마저도 너끈히 품어주었다.
보자기를 매고 굽어진 산 고개를 오르내리길 반복하면 태극기만 높이 휘날리는 단층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매일 얼굴 보던 마을 친구들과 처음 보는 얼굴들 오십 여명이 수북이 모여 수업을 듣던 교실, 나지막한 나무 의자와 선생님의 풍금 소리를 떠올리며 정오에 다시 골목길을 향해 산을 타기 시작했다.
“완아, 길 조심해서 다녀 오거래이.”
갓 등교하는 첫애를 바라보는 어미의 눈빛은 부산한 아침에도 인자함이 흘렀다. 아버지를 빼닮은 용모와달리 느긋한 성정의 아이에게 그녀는 언제나 말을 아꼈다. 어미는 그 대신 등굣길에마저 해진 외투를 입은 대완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어주었다.
대완은 처음으로 손에 풀냄새 보단 종이 냄새가 가득 밴 오전을 보내고서, 엄마가 만들어준 책보자기를 둘러매고 집으로 향했다. 짝꿍이랑 책상 나눠 써야 하는 교실과, 방 두 칸에 열 명이 넘 는 초가와 달리 산에서는 오롯이 대완 혼자였다.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나무가 대완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뜀박질을 해도 온전히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산길. 대완은 바람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듣기 위해 종이 냄새를 둘러매고 산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스산한 봄바람이 소나무의 송홧가루를 흔들어 바람에 태워주었다. 평소와 다른 달음박질에 초봄의 산들바람도 대완을 따라붙었다.
집에 오자 엄마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반겨주었다.
“야야 다녀왔나. 근데 보자기에 책들은 다 우에뿐노?”
“예?”
“길에 책 떨어지는 것도 모리고 뛰 왔능갑네.”
헐레벌떡 돌아간 산길에 뜀박질의 흔적은 드문드문 발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친구 집에서 우연히 읽은 헨젤과 그레텔처럼 학교 가는 길을 까먹지 않기 위함이었을까.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지도 모른채 보자기를 도로 채워 돌아오는 대완을 보며 엄마는 빙그시 웃었다.
“완아,아까 보자기가 가볍진 않드나?”
그리고평소 인자한 엄마가 아닌선대로서 한 마디를 더 얹었다.
“그래도 니가첫째인데 커서도 이카면 곤란하데이.”
뿌리를 내리는 나무들처럼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대완은햇살과 바람 사이에서 조금씩 자랐다.
산길을 오르내리던 헨젤은 자전거 페달로 읍내까지 내달리는 중학생이 되었다. 바짝 깎은 머리를 한 남중생의 등에는 흐물거리는 보자기 대신 엄마가 장날에 사 온 감색 가방이 짊어졌다. 농사로 자식을 키우는 부모님의 마음이 매일같이 교과서에 실렸고, 그 가방 안에 한 권의 문학책 무게만이 언제나 대완의 몫으로 돌아갔다.
대완이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한옥 문풍지로 얼기설기 비치는 검은 두 그림자는 밤늦도록 앉아 있었다.
“형편이 이래도 첫째는대학교에 보내야 안 되겠능교.”
“......”
“와이 아부지가 아주바님한테 잘 좀 얘기해가고등학교를도시에 있는 그 집에서다닐 수 있게 잘 좀 부탁해 보이소...”
“......”
부모의 가난하고도 지난한 소원을 바쳐 들고서 대완은 좁은 학교와 식구 많은 집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부모님의 배웅을 뒤로하자 경적소리 가득한 회색빛 건물 사이에 어느새 홀로 서있었다. 큰아버지 댁으로 향하는 동안 대완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던 동산을 한 발자국씩 잊으며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