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소피스트, 50대(여)
그곳은 나른한 휴일에 자취방 부근 골목이었지요. 그 골목에는 장마보다 꿉꿉한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치고 mp3를 귀에서 빼지 않고 습도를 버티며 걷는 20대 중후반의 제가 있었어요. 습한 대중탕에서 갓 빠져나온 나는 피부는 보송하고 머리는 드라이기로 대충 말려 살짝 축축한 상태의 쾌적함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몸에서 나는 비누 냄새와 같은 향이 잔뜩 밴 플라스틱 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엔 세신사에게서 사 온 바나나우유가 반쯤 남아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심한 습도에 목 뒤로 꿉꿉함이 따라와, 바람이라도 좀 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골목을 걸었습니다.
그런 소소한 바람이 소소한 것이 아니었는지, 시멘트 아래에서부터 눅진한 기운들이 훅 올라오더니, 금새 물컹한 물비린내가 제가 서 있는 골목으로 저벅저벅 진격하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어요. 하늘이 잔뜩 찌푸리더니 목욕 바구니 위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우산은 챙겼지만 이 정도 폭우에는 금방 생쥐 꼴이 되겠다는 생각에 급히 셔터 문이 닫힌 어느 가게 유리문 앞으로 한층 올라섰습니다. 성큼 찾아든 비는 제가 마주하는 골목길을 후두두 두드리며 지상의 것들을 침잠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토독이며 쉴 새 없이 노크하는 투명하게 반짝이는 빗방울은 무서운 속도로 제 운동화에도 한 방울씩 침투했습니다.
초록빛 먼지를 시원하게 씻겨내는 수시로 싱그럽게 쏟아지는 장마철. 이어폰 속 음악 소리에 맞추어 처마 속에서는 흑백의 습윤함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아... 내일 출근하면 아침부터 할 일이 많네...”
“집주인아주머니가 가을부터는 전세금을 올려 받겠다던데...”
현실의 꿉꿉함도 밀려드는데, 비는 멈출 생각을 않고 집에 가려는 나를 방해합니다. 제 청춘은 수시로 발밑에 물이 차오르는 기분이었어요. 현실 묻은 걱정에 고개를 숙이니 뽀송하던 발은 다 젖은 운동화에 의해 축축합니다. 그러다 툭.
바나나우유에 인 이슬이 발에 떨어집니다. 나는 바나나우유를 먹으며 고개를 듭니다.
차르르르... 토도독...
리드미컬한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불규칙한 박자들이 차양을 울립니다. 콘크리트 바닥에 눌린 보이지 않는 미물들이 스며드는 빗물에 고개를 내밀고, 아스팔트 속에서 흙냄새가 고이고, 하다못해 보도블록 위에 끼인 속 이끼도 빗물을 머금은 채 잔뜩 신이 났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다시 걷고 싶었습니다. 나는 바나나우유를 마지막 모금까지 들이키고서 차양 밖을 나갔습니다. 작은 우산 속 청춘은 그렇게 녹녹한 휴일의 평화 속을 걸어갔습니다.
집에 와 세족을 마친 그날 이후에도, 하얀 손바닥 위로 토독 떨어지는 습한 파편들은 마치 중력이 없다는 듯이 때때로 푸른 내 그림자와 빛바랜 발자국들이 아프게 찌르고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필름 카메라로 골목의 작은 것들을 찍었습니다. 돌멩이에 붙은 이끼, 전선에 상주하는 참새들, 목욕탕의 온 벽을 휘감은 담쟁이들... 인생이 끝나지 않을 지루한 여름 같을 때, 나는 골목에서 함께 여름을 견디는 또 다른 여름들을 남기며 제여름을 견뎌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원했던 게 아니더라도 가을은 찾아오더라고요.
그날의 평화를 건너 오늘까지 날아든 저는 차양 밖으로 팔을 뻗어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추억도 같이 흘러내리는 유리창 너머 빗소리와 곰팡이가 노리는 후미진 골목의 눅진함, 골목 위에 복잡하게 펼쳐진 전봇대 전선들 위의 너른 하늘, 나른한 풍경 사이로 달큼하게 삼키던 바나나우유. 그리고 골목 속 미물들의 사진들... 습하고 꿉꿉한 그해 여름으로 더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마침내 풍경 속 그림으로 남은 빛바랜 초상들이 과거와 현재의 빗소리 사이로 추적추적 섞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