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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추억군 회상면 퇴색리

ID scarecrow, 40대(남)

by 지구 사는 까만별


매년 가을이면 꺼내 보는 사진이 있습니다. 하늘색 남방과 청바지를 입은 청년이 드높은 하늘과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길을 자전거로 따르릉 소리를 내며 가릅니다. 논두렁이 고향인 자전거는 낯선 청년의 휘파람도 페달에 실은 채, 가을 초입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들녘엔 벼 이삭이 익어가고, 바람을 타는 허수아비의 손끝도 햇살에 여물게 익는 계절이었습니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권태롭다면 권태로운 이곳에서 나는 여가시간에 매일같이 구불구불 금빛 시골길을 자전거 바람으로 깨웠습니다. 분필통은 자전거 속으로 하염없이 들어오는 들꽃을 피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농어촌 실습을 나온 교대생이었습니다. 실습 첫날, 나지막하게 알록달록한 시골 학교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같은 대학을 다녔어도 과가 다른 이유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던 그녀는 연분홍 셔츠 원피스를 입고 있었습니다. 환한 미소로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보며 저는 내심 그녀와 같은 학교에 배정받았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학생들에게 타박하기 바쁜 타 선생님들과 달리, 복도 창 너머로 본 교생 선생님은 언제나 교실의 아이들에게 다정한 모습이었습니다. 원피스를 입고 아이들에게 친절한 그녀를 보고 안 반할 재간이 없었다는 게 맞겠지요. 부드러운 능선에 해가 질 때 즈음이면 매일같이 보던 노을에서 그녀의 웃는 모습이 파문을 일으켜 땅거미 질 때까지 일렁거렸습니다.


실습학교에서 배정해 준 숙소는 학교 부근이었습니다. 업무가 끝나면 숙소로 돌아와 각자 휴식을 취한 후, 저녁 시간에 교생들은 모두 한 식당에 집결했습니다. 생선을 싫어하는 저였지만, 그녀와 바로 옆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그 코다리 집에 저는 매일 어떠한 볼멘소리도 없이 저벅저벅 걸어갔습니다.

실습생들이 둘러앉은 테이블에서 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모두가 흥성스럽게 잔을 부딪치고 농담을 주고받고 해도 저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웃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몇 주 뒷면 끝날 인연. 그녀가 좋은 선생님으로 거듭나면 그만일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저 같은 건 그냥 지나갈 인연 아닙니까.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그날도 자전거를 타며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타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샛길로 가보고 싶어 좁은 숲길로 들어갔습니다. 포장은커녕 커다란 자갈이 가득한 산으로 들어온 것을 후회하며 페달을 밟은 지 5분쯤 되었을까, 다 익은 들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숲이 끝났다는 생각에 신나게 페달을 밟으니, 황금빛 들판 한가운데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홀로 서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출근할 때 입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홀로 한참을 서 있었던 것일까. 논밭에 나타난 침입자에 놀란 것인지 그녀는 나와 자전거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자전거를 세우고, 그녀의 옆에 섰습니다.


“선생님, 산책 나오셨나 봐요.”

아 네 선생님. 상투적인 표현이다만 정말 그림 같은 풍경이에요.”

난 ‘그쪽이야말로.’란 말을 삼키며 대화를 이었습니다.

여기서의 생활은 괜찮으세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습니다.

네, 학생들도 괜찮고, 담임 선생님도 좋으신 분인 거 같아요. 그런데 제가 매운 걸 잘 못 먹다 보니 저녁마다 코다리찜을 먹는 게 조금 힘드네요.”

나는 참을 수 없이 크게 웃었습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하하 반갑네요. 전 생선을 못 먹거든요. 매일 공깃밥과 무생채만 먹는 건 조금 곤욕이긴 합니다.”

“저는 고구마 줄기요.”

소리 내어 웃는 그녀를 보며 처음으로 배고픔을 느꼈습니다. 그녀가 그동안 배고팠기 때문이지요.

“선생님, 우리 매일 여기서 만나서 미리 요기를 좀 때우는 게 어때요? 제가 과일이라도 좀 구해올게요.”

과일이란 말에 그녀는 나를 반갑게 쳐다보았습니다.

과일이요? 곤란하시진 않으실까요?”

나는 문제없다는 제스처를 취하고선 조금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수줍게 튼 그날의 대화 이후로 저는 퇴근하고서 매일같이 과일 서리를 했습니다. 가을철이라 그리 어렵진 않았고, 서리하다가 걸려도 제 얼굴을 보고선 조용히 사라져 주셨습니다. 그녀에게 바칠 공물이 조그마한 바구니 가득 채워지면 저는 자전거를 타고 숲을 건넜습니다. 그녀는 과일의 수급처를 묻지 않고 허겁지겁 맛있게 먹어주었습니다. 바구니를 사이에 두고 매일 보는 노을에서는 과일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실습이 끝나가며 그녀와 함께 걷던 고즈넉한 산책길도 어느덧 끝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회식으로 고기를 먹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지라, 저는 바구니 없이 그녀에게로 갔습니다. 황금빛 가을 들녘에 가을 햇살에 더욱 붉어진 풍경 안에 그녀가 들어 있습니다. 자전거 페달에 찬란한 심장 소리가 더해져 찬찬히 그녀가 다가옵니다. 바구니 없이 바로 그녀 옆에 앉으려니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곤란할 따름이었습니다. 괜히 자전거만 만지작 거리는 나에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선생님, 과일 고마웠어요.”

나는 밝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청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그녀가 황금 들판과 함께 일렁이고 있습니다.

“선생님, 이번 실습 기념으로 여기서 사진 한 장 찍어드릴까요? 참 예쁘네요...”

금빛을 출렁이는 지평선 아래 햇살이 노을빛을 토하고 있습니다. 나는 동그란 카메라 렌즈를 열어 자연처럼 웃는 그녀의 미소를 잡아 렌즈 안에 담았습니다. 현상한 사진은 본교에서 주기로 약속하고 우리는 회식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유의 연쇄 때문일까요. 나는 아직 그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린 한적한 들꽃의 기억 너머 여름날 꽃잔디로라도 남을까요. 찾아올 봄에 더는 설레지 않을 대신, 한때 청춘이었다고 튀어 오르는 금빛 편린들에 의해 나는 아득하게 퇴색해 갑니다. 그리고 기억은 퇴색되지 않아 나는 몇몇 개의 황금색 순간들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https://youtu.be/LW3Rd2hGHoI?si=-zMFMTj-0YJkcay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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