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그 끝에 남겨진 잔상
그것은 어느 순간 너의 자산이 되어 드넓은 시야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찰나에 느끼는 감정을 멋지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그런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된 진심을 담아 전한다.
환상은 기쁨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잿더미가 되기도 한다. 아이가 쓰는 글은 환상을 넘어서 아득한 무언가가 존재했다. 숨 가쁜 현실 세계에서 이루지 못하는 이데아를 추구하자는 마음으로, 모든 글자를 적어 내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손으로 잡히지 않는 것도 모두 나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네게 닿을 수 없는 시간의 연속이야.’
아이의 눈망울을 보면 글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이런 느낌이었다. 사무치게 좋아하지만, 막상 곁에 두는 날은 많지 않았다. 또 가까스로 미워하는 날도 많았다. 가까워지려고 하면 도망가는 모습에 마음의 문을 닫은 날도 쉽사리 존재했다.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아이의 영원한 안식처였기 때문일까.
깊이 생각해보면 문학, 가치관, 직업 등 삶의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자신만의 가치관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수단이었다. 어쩌면 타인을 위하고, 위로하는 방식에서도 따뜻한 매개체가 되었다. 기뻐하면서도 조금은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노스텔지아의 느낌. 떠나온 고향에서 느끼는 감정과도 비슷하다. 또는 한 편의 추억을 다시금 꺼내어 보는 일상과도 같다.
때로는 미친 듯이 외롭고 고독했을 때도 글쓰기를 선택하기 마련이었다. 고통을 전부 담기엔 서투른 글솜씨에게 미안했다. 감정적이고 서투른 아이의 글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그 자체였다. 달마다 세공을 거듭하여 다음 연도에는 빛을 발하는 보석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 보석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곁에 늘 머물렀으며, 사계절이 지나도 배신하지 않았다.
따뜻한 봄날에는 개나리를, 햇볕이 따사로운 여름에는 해바라기를, 구름이 몽글한 가을에는 코스모스를, 시린 겨울에는 동백나무를 한 아름 담아 오기 일쑤였다. 그렇게 해마다 두드리고 찾아와 완성된 꽃바구니에는 이런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바깥에는 예쁜 꽃들이 더 많은데,
나와 함께 보러 가지 않을래?
메시지를 읽은 아이는 순간 멈칫했다. 검은 환상 속에서만 살다 보니 이런 감정은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따스하고 찬란했다. 더불어 한 걸음씩, 천천히 밖으로 나와 꽃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조금씩 채집한 꽃을 모아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예쁜 반응이 새삼 고마웠다. 뜻하지 않게 세상의 이치를 알려준 보석에게도 고마웠다. 오로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삶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정말 생각했던 것보다 세상은 더 넓고 배울 것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아득한 검은 환상 속에 빠져있기에 너무나도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내가 정해놓은 생각대로 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순간의 오랜 좌절로 자신의 미래를 단정 짓지 않았으면 한다. 어쩌면 나와 손을 맞잡고 걸어도 좋으니 실망하고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른이 된 아이는 희망적이고, 진취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늘 갈망하는 삶을 살고 있다. 뒤늦게 배움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떤 것을 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만큼은 확실히 파고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바보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할 줄 아는 게 많은 똑똑한 바보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바보가 꼭 나쁜 건 아니다.
더불어 똑똑한 바보는 낭만적인 삶을 추구하는 어른이 되었다. 이 어른의 세상은 무해한 어린아이의 내면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좋아하거나 편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순진무구한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에 소중한 마음을 익히 알기 때문에 앞으로 놓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참 많다. 하지만 때로는 무너지더라도 이 글을 보면서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