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여전히 어른의 심장 조각을 찾지 못한다
무언갈 쥐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 날이었다. 마치 위태로운 낙엽 사이로 흐르는 이슬방울과도 같았다. 나조차도 걷잡지 못한 감정을 애써 숨겨 보였다. 걷잡지 못한 감정은 터무니없이 겁도 없었고, 무언의 압박이 담긴 화살은 내 심장을 쏜살같이 겨눴다.
'근데 이건 나답지 않아.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타인의 시선 속 소녀는 마냥 해맑기만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울음을 뒤로 감춘 채 가면을 쓰고 살아갔던 것이다. 마음속은 텅 비어 있는 채로 말이다. 아이는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연인이든 친구든 누구든 간에.
내가 주는 만큼 상대방도 나한테 주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과 사랑은 영원할 거란 기이한 믿음 때문이었다. 지독하게 사랑을 갈구한 건 아니었지만, 이 사람의 행동과 말투에 하루를 살아갔던 적이 많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엇이 문제였는지 잘 몰랐었다.
시간 지나 한 뼘 더 자라고 보니, 밑 빠진 독에 물을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처럼, 자꾸만 새어나가는 자존감이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아이는 관계에 있어서 먼저 굽히고 들어갔던 것이다. 잘잘못을 철저히 따질 관계도 아닌데 말이다.
"어머니, 이 아이는 왜 이렇게 말수가 없는 걸까요?"
"그래요? 집에서는 누구보다도 말을 잘하는데.."
불현듯 어느 집단에서나 항상 주눅 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감당 못할 시선과 욕지거리를 다 받아냈던데, 그 시간 속의 너는 어떻게 버텨낸 걸까.
아이는 말했다.
"사실 버틸 수가 없었어. 근데 여기서 도저히 끝낼 자신이 없더라고."
그랬다. 아이는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가지도 못했고, 숨고 싶어도 숨을 곳을 찾지 못했다. 그냥 그런 채로 여생을 보내겠다고 생각했다. 행복을 찾기엔 앞이 너무나 칠흑처럼 깜깜했기에, 몇 걸음 내딛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만 반복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아물고 나면, 또 같은 이유로 흉터 남아 다치게 되었다. 근데도 알 수 없는 믿음이 있었다. 사람에게 상처받기도 하지만, 사람에게 위로를 받기도 하니깐.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의존하지 않았으면 한다. 공허해서 만난 인연은 그 시절이 끝일뿐이니까. 설상 오래간다고 해도 마음이 건강한 상태에서 만난 인연을 이기진 못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도 지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아직도 누군가 날 싫어한다고 하면, 조금은 신경 쓰인다. 나는 감정 없는 로봇이 아니니까. 어쨌든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체적인 삶을 살다 보니 느낀 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하찮은 먼지투성이에게 할애하는 시간이 정말 아깝다는 것을. 그 시간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더 연락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애정을 듬뿍 쏟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혼자 있어도 외롭지가 않았다. 스스로 이겨내는 법을 조금은 터득한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옛 과거에 갇혀있기만 했던 아이는 차차 알을 깨고 나와 자유분방한 어른이 되었다. 아이가 겪었던 아픔은 어른이 봐도 심장을 송곳으로 송두리째 파놓은 듯했다. 웃음 뒤의 가면 속에는 너덜너덜한 심장 조각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밝은 가면만 골라 쓰고 나갔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어른의 심장 조각을 찾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