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험난한 세상을 이해하기에 너무도 어렸다
2014년 12월의 한 겨울, 등굣길의 추위는 두 볼이 차갑게 시릴 만큼 매서웠다. 그것보다 더 매서웠던 건 아이의 12월 겨울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등교하는 아이들, 일렬종대로 띄엄띄엄 나란히 선 자동차를 보며 조금씩 발을 내디뎠다. 아이는 학교 가는 길이 오늘따라 왜 이리 삭막한 지, 라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
'차라리 시간이 멈췄으면..'
아이는 등교 시간이 다 되자 걸음을 재촉했다. 전혀 지각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뭐랄까, 차라리 지각해서 선생님한테 혼나는 시간이 더 낫지 않을까 했다. 어떻게든 나를 깔보는 시선보단, 지각으로 정당한 벌을 받는 게 더 달콤한 시간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하나의 시선뿐이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시선이 두 개가 되고, 두 개가 모여 시선의 크기는 점점 커졌다. 이미 전처럼 되돌리기엔 크기의 깊이가 커져서 되돌릴 수도 없었다.
오로지 그들은 단 하나의 먹잇감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먹잇감을 헐뜯는 순간에 생기는 전우애는 참 끈끈하고도 웃겼다.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아이들은 아이를 시선의 무덤 속에 가둬놓기 일쑤였다. 그리고선 한참을 웃고 떠들기에 바빴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아이는 글 쓰는 것도 좋아했지만, 의존할 곳이 글뿐이었다. 글 이야기의 내용만큼은 해피엔딩으로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아니, 마디마다의 내용도 행복의 정점을 찍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가 쓰는 소설의 내용은 언제나 우울을 극복하는 주인공이 기반이었다.
"이거 뭐야? 너 뭐 쓰는 거야?"
"그냥 글 쓰는 거야."
아이의 대답을 듣자마자 질문했던 녀석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를 이해 못 한다는 표정이었다. 어떤 의도였던 간에 썩 좋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지나갔다. 그 친구의 분명한 의도가 다분했다.
근데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종일 뭔가를 끄적이는 아이가 이상해 보였겠지. 여전히 떠오르는 그날의 얼굴 표정, 그래도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냥 내가 이상한 줄 알았다. 아무 이유 없이. 어떠한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모여서 떠들기에 바빴으니까. 근데 나는, 나는 아니었으니까.
그 순간에도 글에 대한 욕심은 버리지 않았다. 이것마저 놓치면 나에게 남는 건 없었다. 내가 어른들에게 들어왔던 소리는 '글을 참 잘 쓴다.'라는 한마디 었으니까. 난 이 말이면 충분했다. 다른 어떤 말보다도 위로가 되었다.
늦은 오후, 아이는 텅 빈 교실에 앉아 가만히 생각했다.
'내가 잘못된 걸까?'
아이는 몇 초 뒤, 자기 자신이 잘못됐다고 대답했다.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너무나도 컸고, 장점보단 단점만 쏙쏙 찾아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이내 아이가 잘하던 글쓰기마저 부정당하고야 말았다.
'이제 글 쓰는 것도 그만할래.'
악의 담긴 시선 속에서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지고 말았다. 그래서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딱히 일상에 달라지는 변화도 없었다.
그저 아이는 험난한 세상을 이해하기에 너무도 어렸던 것이다. 어리다는 게 때로는 무기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무력함이 될 수도 있다. 더더욱 옆에서 손 내밀어 주는 이가 없다면 말이다.
어른이 되고 난 아이는 그때의 아이를 보면 마음 한쪽이 저려온다. 지금은 과거의 시간 속에 살지 않지만, 이따금 생각날 때면 왠지 모르게 욱신거린다. 과거에 딱 한 번이라도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때의 아이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
'넌 잘못된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