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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 다음 Mar 26. 2022

모호한 경계 속

어그러진 시간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늘 그랬듯, 한 소녀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이들은 소녀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관심 끝에서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은 단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싸늘한 공기는 모두가 향한 시선의 바닥으로 한없이 비틀거렸다. 허무맹랑하기 그지없었다.

 안 그래도 눈치가 워낙 빨라 그 표정들 속에서 알 수 있었던 건, 네가 빨리 빠져줬으면 좋겠어, 라는 시그널이었다.




 딱 이맘때쯤이었다.

 쓰라렸던 기억의 조각을 하나씩 내던지려 한다.


 체육시간마다 홀로 서있는 아이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기 십상이었다. 가장 맴도는 기억 두 조각 중 하나는 체조하면서 서럽게 울던 모습이었다. 다른 하나는 체육시간 전후였는지 어렴풋하지만, 국물을 떠먹다가 슬픔 한 방울이 국물 속으로 들어갔던 기억이었다.


 그땐 왜 그렇게 눈물이 많았을까. 아이는 울던 모습만 기억한 채, 자신이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미운 마음을 한데 모아 친구들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건 또 아니었던 것 같다. 복수는 언제나 꿈꿔왔지만, 성격상 딱히 복수하고 싶지도 않았다.


 쌓인 게 많아 점점 억울하고 분했지만, 그 자리에서 아이는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사람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끼리 편을 먹곤 한다. 하지만 아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아이는 단 하나의 아이밖에 없었다.


 그러니 무슨 수가 있겠는가. 마음속의 응어리짐을 묵묵히 안고 가거나, 따가운 눈초리가 가득한 소굴을 벗어나는 것. 아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게 최선이었다. 아, 돌이켜보니 다른 반에 속했던 한 명의 친구가 존재했다. 비록 같은 반 친구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이 친구가 있어서 적적한 학교생활을 달랬던 것 같다.


 아무튼 이 친구는 아이와 달리 학교에서 인기도 많고, 성격도 서글서글한 예쁘장한 친구였다. 솔직히 이 예쁘장한 아이와 딴판인 아이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시선이 수두룩했다.




 덜컥 겁이 났다. 나는 너와 친해질 수 없었다. 시작부터 레벨이 다른 너와 내가 친해지면, 사람들은 또 달려들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같이 감당하기에 너도 꽤나 마음이 여린 친구였다.


 아이는 누군가와 친해지기도 전에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괴로웠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구태여 앞날의 일까지 짐작하면서 관계의 진전을 따졌으니까.


 근데 아니나 다를까, 친해지고 나니 아이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너는 왜 쟤랑 친구야?"

 "쟤는 너랑 친구 하고 싶대?"


 일종의 가스라이팅이었다. 사람들은 아이의 마음에 의심의 불씨를 활활 지피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질문세례에 아이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조그맣던 불씨는 화재의 동력이 되었고, 점점 타들어가 앙상한 잿가루만 남게 되었다.


 그저 마음 하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던 건데, 나는 그마저의 소소한 행복도 누리면 안 되는 거였을까. 아니면 시작부터 만만하게 보였던 '나'라는 존재 자체가 거짓이었던 걸까. 모든 게 싫었다. 소중했던 것마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정 맞서 싸울 수 없다면, 차라리 도망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게 낫겠지, 라고 판단했다.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 절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었다. 어떤 말을 해도 그들은 듣는 시늉조차 안 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넌 어디서 전학 왔어?"


 그렇게 아이는 새 출발을 시작했다.


 모호한 경계 속에서, 어그러진 시간을 되찾기 위해 여정을 떠나고야 만 것이다. 누군가에겐 순간의 선택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잿가루의 심장 조각만 남은 아이에게 최선의 선택은 이것뿐이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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