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라스틱 러버 Apr 20. 2022

손 떠는 아가씨

"여러분도 손 떠는 간호사가 주사 놓는 건 싫으시죠?"

 긴장은, 인류가 진화해오면서 수많은 위기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기여한 엄청난 능력이다. 그만큼 필수 불가결한 사항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긴장되는 순간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한다거나, 평가자 앞에서 실기 시험을 본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럴 때면 아주 담대한 성정이 아닌 이상, 약간씩 떨기 마련이다. 정도에 따라서 마이크 쥔 손이 파르르 떨리거나, 심지어 그 떨림이 목소리까지 전달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나를 아는 사람 10명에게 물었을 때, 10명 모두 심약하다고 할만한 사람이다. 전공 시간, 발표 수업에서 자리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리는 와중에 목을 축이면서 컵을 쥔 손이 심하게 떨릴 때, 부끄러워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진 않을까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던 기억이 난다. 실습 시간, 조교님 앞에서 처음 해보는 술기를 할 땐, 주사기와 바이알을 쥔 손이 덜덜거려서 그만 좀 떨라고 등짝까지 맞았던 적도 있다.

조교님께 등짝을 맞게 만들었던  '이 행위'

 조금 민망하고 부끄러워도, 발표나 술기를 잘하지 못해도, 이 정도면 누구나 겪는 수준이라며 크게 개의치 않을 때도 있었다. 어느 날 그 생각은 가볍게 무너졌다.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펜을 쥐고 필기하는 내 손이 약간은 지나칠 만큼 떨고 있었다. ‘왜 이러지?’하고 의아함이 일었다. ‘요 며칠 몸살기가 있다가 나은지 얼마 안 돼서 힘에 부치는 걸까?’, ‘아니면 얼마 전에 먹은 기관지 약 때문에 아직도 떨리는 걸까?’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봐도 명쾌한 답이 나오질 않아 어쩔 수 없이 강의를 마저 듣고 필기했다.


 며칠 동안 일상생활을 하면서, 내 손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다. 양팔을 쭉 뻗어 보기도 하고, 가볍고 무거운 물건을 쥐어보고, 스트레칭도 해보았다. 하지만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손이 떨리는 강도는 심해질 뿐이었다. 오히려 온종일 들여보고 있자니 스트레스가 가중되어 잠까지 못 자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주일쯤 지나자 어깨부터 손가락까지 양팔의 통증이 시작되었다. 점점 울상이 되다 못해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4학년이었고, 대학병원에 입사하기 위해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간호 학생이었다. 직무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내가 준비하는 일은 손끝의 감각 및 숙련이 중요한 직업이었다. 지금까지 배워왔던, 안 그래도 썩 잘 해내지 못했던 술기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본래도 심약한 내가 하루에도 몇 시간씩 덜덜 떨리고 아픈 손끝을 보고 있자니 여러모로 건강하지 못한 기분이 심각하게 들었다.


 내게 아주 가까운 사람, 나의 자매, 나의 작은 언니에게 사실을 말했다. 나의 작은 언니는 악기를 전공했다. 언니는 피식 웃음 짓곤, 자신도 그 정도는 떨린다며 손끝을 내밀었다. 정말로 언니의 손끝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남들보다는 약간 떠는 정도였다. 나보다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 일까, 애초에 나보다 대담한 사람이어서 일까? 언니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아주.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듣곤 기분이 아주 약간 나아졌을진 몰라도 전처럼 괜찮아지진 않았다. 내가 언니와 비슷하게 떠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내가 더 떠는 것 같고, 언니는 언제부터 떨렸는지, 나는 왜 이 나이에 떠는 건지, 그전부터 떨었는데 이제야 알게 된 것인지, 크게 의미 없는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악기를 하는 그녀도 아무렇지 않은데 내가 오버하는 것 같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하지만 나는 손 떠는 내 모습이 너무도 싫었다. 싫은 건 싫은 거였다. 공부하면서 스쳐 지나간, 전공 책에 적힌 한 줄, ‘변화된 신체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자.’ 뭐 이런 거나 떠올리는 시간이었다.

"인간들아, 오버하는 능력은 지구 상에서 내가 최고다!"


 통증이 점점 심해지는 차라 결국 근처 신경과를 내원하게 되었다. 약간은 고루해 보이는 의사 선생님이 나의 손을 보고 고루한 표정을 지었다. 그전에 아픈 곳은 없었는지, 언제부터 증상이 시작됐는지 등을 묻고, 글씨를 따라 쓰게 하고, 소용돌이를 그리게 했다. 내가 그린 소용돌이는 나의 기분처럼 찌글거렸다. 증상이 발현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찾아왔냐는 퉁명스러운 선생님의 말씀에 어딘지 모를 부끄러움과 민망함, 초조함, 스트레스 등이 올라왔다. 그 감정들은 눈물로 나에게서 흘러나왔다. 나는 그날 의사 선생님을 마치 청력을 잃은 베토벤 혹은 시각을 잃은 모네의 주치의가 된 기분을 느끼도록 해주었다. 나 또한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니면서 지나치게 심각한 나 자신이 썩 달갑지 않다. 본인의 성격에 크게 만족하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 각설하고 넘어가 주길 바랄 뿐이다.

적어 내려간 문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은 기분이 참 좋습니다.'



 몇 가지 검사를 통해 ‘본태성 진전’이라는 진단받았다.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안다. 원인으로는 유전적인 소인이 작용할 수 있고,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을 시 치료받지 않아도 될 만큼 경한 병이었다. 나보다 대범한 작은 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대증치료’라는 말이 있다. 증상에 맞춰 조절하는 치료를 한다는 뜻이다. 손 떠는 나에게 손을 떨지 않는 약, 통증을 줄이는 진통 소염제, 스트레스로 지나치게 긴장한 근육을 이완시키는 근이완제 등이 처방되었다. 소염제는 위에 자극을 줄 수 있어, 위 보호제도 복용해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약은 이상하게 먹다 보면 계속 추가된다며 선생님은 웃었다. 나도 웃기지 않지만 웃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약 처방을 줄여서 수전증을 조절하는 약만 상비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먹고 있다. 수전증이 있으면서도 간호사를 몇십 년째 하는 사람들의 수기 등을 인터넷에서 읽기도 하고, 네가 외과 의사도 아닌데 크게 신경 쓰지 말라는 가족들의 말을 새기기도 하였다. 정 아니라고 생각이 들면 임상을 때려치우고 다른 길로 떠날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있다. 누구든 손 떠는 사람에게 팔을 구멍 낼 자격을 주고 싶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내가 손을 떠는 내 모습에 어떻게 적응했는지, 아직 적응하기는 했는지, 앞으로 나의 직업 전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많다. 예민한 내가 더 예민해질 것이 침울한 일이긴 해도, 더 큰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하고, 또 다른 닥쳐올 슬픔에 대비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아직도 손을 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