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조각들로 내면 채우기
얼마 전 만난 한 친구가 대화 중 내게 물었다.
너 자존감이 높은 편이지? 그런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하면서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친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인데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정식으로는 첫 만남인 꽤나 낯선 사이의 동창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럴 거라고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내게서 그런 기운이 느껴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날 이후로 문득문득 그 친구의 말이 떠올랐고, 흔하디흔한 자존감이라는 용어의 진정한 의미를 처음으로 검색하게 되었다. 제대로 말하면 자아존중감. 쉽게 말해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 또 지식백과에 따르면 ‘자신에 대한 존엄성이 타인들의 외적인 인정이나 칭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 내부의 성숙된 사고와 가치에 의해 얻어지는 개인의 의식’을 일컫는 말.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의 외면에 묻어 있는지 궁금했기에 나의 내면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생각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 자문해 보았다.
내 일상을 채우는 여러 조각들 중 꽤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요가 수련을 떠올렸다. 그 부피가 크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조각들을 같은 빛으로 물들이는 조각이다. 내가 다니는 요가원에서는 수련의 시작에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데, 이때 매달 정해지는 요가원의 주제에 맞게 각자의 생각과 마음을 공유한다. 처음에는 발표할 때처럼 부끄럽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다. 하지만 굳이 애쓰지 않으면 추상적인 구름으로 부유하다 이내 사라져 버리는 생각들에 나만의 언어를 건네는 그 짧은 시간은 이어지는 육체적 수련만큼이나 중요하게 다가왔다.
어느 날의 수련에서 원장님은 요가원을 처음 시작할 당시에 대한 에피소드를 나누셨다. 많은 주변인들의 눈총과 걱정에도 온 마음을 쏟아 야심 차게 오픈한 요가원의 첫 주는 수강인원으로 바글바글했고 속으로 ‘됐다!’를 외쳤지만, 이내 오픈빨이 사그라들며 공간은 자주 비었고 최소 인원이 차지 않아 폐강을 하기 일쑤였다는 이야기였다. 오픈 초기부터 함께한 나도 돌이켜보니 지금과는 달리 당시 내가 예약한 수업이 폐강된 경우도 있었고, 2인 수업을 한 날도 꽤 많았던 것 같다. 단지 나는 2인이면 거의 개인 수업이라며 좋아했고, 폐강된 날은 ‘안 그래도 오늘 피곤했는데 일찍 집에나 가야겠다’하며 내심 안도했을 뿐, 그런 요가원의 사정과 원장님의 고충을 알 리가 없었다. 원장님은 그때 ‘아, 내가 정말 잘못된 선택을 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매일같이, 수업이 없는 날에도 아침 일찍 요가원을 오픈하고 하루 종일 그 공간에 머무르며 청소를 하거나 몸을 바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채워 나갔다고 한다. 본인의 선택을 후회로 남기지 않기 위해, 그 선택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 위해.
원장님의 그 결심이 꽤나 멋있었고, 그 단단한 마음이 참 존경스러웠다. 그동안 나누었던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도 특히 그날의 문장들은 수련하는 내내 머리맡을 맴돌았으며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이따금 마음을 건드렸다. 그것들은 내가 쌓아온 크고 작은 선택들을 고찰하게 만들었고, 앞으로 일으킬 선택들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었다. 말보다 실천을 앞세우고 오늘 할 일에 집중하며 꾸준하고 부단하게 나아가려는 나름 진취적인 사람이라 자부하는 나는, 아직도 ‘후회’라는 단어 앞에서 주춤거린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내가 괜찮다고 생각하면 다 괜찮은 거라는 신념을 모토 삼아 살아가지만, 내가 괜찮지 않을 때 오롯이 내가 져야 할 책임과 부담을 회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내 선택에 대한 후회를 마주했을 때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거대하고 무거운 짐을 지우는 대신, 그 선택을 후회로 만들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채워나갈 수 있는 작은 실천들이 있다는 발상은 실로 위안이 된다. 예컨대 지금처럼 매일 짤막한 글을 쓰며 내 마음의 모양을 알아차리고 내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하루하루 자각하는 일처럼 말이다. 때때로 나를 설레게도 만드는 이 과정에서 요가는 더 좋은 글쓰기로, 글쓰기는 더 건강한 수련으로 나를 인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 사사로운 조각들이 내면의 곳간에 차곡차곡 쌓여 사랑으로 자라나고 있었고, 나도 그것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러한 나의 모습에 무엇이 묻어 있는지, 내게 질문했던 친구가 무엇을 보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당연하게도, 자존감은 스스로 자라지 않는다. 그것이 유전자를 통해 대물림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사람이 성장하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경험 속 풍파를 극복하고 회복탄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내가 가장 힘들고 무기력할 때 자존감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으며, 외부로부터 얻어지는 표면적인 격려는 일시적이다. 물론 내가 도저히 스스로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고 끝없는 나락만이 느껴질 때 타인이 건네는 칭찬이나 통찰의 말은 큰 힘이 된다. 다만 여기서 그 격려를 자신의 고유한 에너지로 전환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분투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 내면의 탄력과 안정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나는 아직 강도 높은 동작에 호흡이 무너지고 견고한 아사나를 완성하지 못해 매번 사소한 실패 앞에 소소한 절망을 하는 소심한 수련자다. 그럼에도 계속하고 싶은 이유는, 그로 인해 나의 일상이 조금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요가를 시작할 즈음 나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왠지 주변으로 시선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막연하게 불편함을 느끼기만 했던 타인의 고통에 더 깊이 연대하게 되었으며 이는 자연스레 비건 지향 생활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나의 절친한 친구는 내게 고기 안 먹는다고 버섯을 그렇게 먹어대다가는 몸에서 버섯이 자라날 것이라는 말을 했다. 꽤나 좋은 생각 같았다. 이왕이면 쫄깃한 식감에 향이 일품이라는 백화 표고버섯이나 주렁주렁 열려라!
하지만 그럴 리가 없으니, 실하고 탐스러운 버섯처럼 나도 조밀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