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념
스물다섯, 스물하나.
매우 공감되는 대사 하나하나에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고개를 끄덕거리며 완전히 몰입해서 보는 드라마다.
귀한 장면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겨두고 싶어 화면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기도 하는데, 어쩌면 이토록 찬란할 수가 있을까 싶다. 특히 나희도와 백이진이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고백하는 부분에서는 많은 시청자가 입을 틀어막거나 가슴을 부여잡았을 것이다.
나희도의 투명한 감정과 그에 대한 솔직한 표현에 설레었다. 희도는 자신과 이진과의 관계는 둘만이 알 수 있다며 그것을 ‘무지개’라 명명하기로 한다. 나 또한 이 닿을 듯 말 듯 하게 반짝거리는 둘 사이의 거리는 뭘까 하며 기대했다. 그들 사이의 묘한 공기를 설명하기에 우정은 너무 엷고, 사랑은 너무 농후하다고 생각했다. 그 장난스럽고 진지한 기류가 여느 드라마의 흔한 사랑의 감정이라고 단정 짓기엔 아쉬웠다. 서로를 옳은 곳으로, 또 좋은 곳으로 이끌어주며 상대가 힘을 내면 나도 힘을 내게 되는, 상대로 인해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 연결망은 과연 어떤 마음에서 피어나는 것일까.
백이진의 적당한 온도를 잃지 않고 기다려주는 사랑 또한 아름다웠다. 두 사람이 다리 위에서 무지개를 구경하는 장면에서 백이진은 그 관계가 ‘사랑’이라고, 무지개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 이때 그들의 머리 위로 무지개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몽환적인 풍경의 연출 속에서, 그들은 눈부시게 영롱한 시간 속을 함께 통과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 작고 찬란한 화면에 넋을 잃은 채, 무지개가 바로 사랑이며 사랑이 무지개라고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수없이 많은 무지개가 겹겹이 포개진, 어느 하나라 단언할 수 없는 색을 닮은 감정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개를 그렸다. 뉴턴의 프리즘 실험으로 근거된 무지개를 이루는 7가지 색이 곧 세상을 이루는 기본색이라 배웠고, 7가지 색 이외의 색연필들은 ‘기타 색’으로 받아들였다. 도화지에 풍경을 그릴 때는 8개의 곡선을 긋고 그 사이사이를 각각의 색으로 꼼꼼하게 메꾸었다. 그렇게 완성된 무지개는 선명하고 예뻤다.
그랬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실제로 본 무지개는 선명하기는커녕 흐리멍덩하고 빨주노초파남보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았다. 그 뉘앙스 정도만 겨우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 일곱 가지 색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일곱 색깔로 나눠진 무지개를 그리라고 학습 받아 온 것일 뿐, 우리는 서로에게 섞이며 번지고 이동하고 어우러지는 색들을 본다. 그 경계는 ‘파랑’이 없는 파란 하늘 위로 스며들고, 시작하지도 끝나지도 않는다. 또 우리는 그것이 공기 중의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빛이 분산되며 나타나는 과학적 현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무지개를 바라보며 우리는 사랑, 희망, 행복, 청춘과 같은 낭만적인 단어들을 떠올린다.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이 색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색은 7가지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새로이 형성된다. 빛과 어둠, 거리와 시점에 따라 변하는 빛, 그리고 색이 가진 심리적 효과 등 다양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우리는 서로를 인지한다.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으로 단정할 수 없듯, 사랑의 정의 또한 간명하지 않다. 드라마 속 나희도와 백이진이 공유하는 유연하고 탄탄한 끈은 서로가 기약 없이 헤어져 있어도 희미해지지 않고, 상대가 어떤 상황에 있든 팽팽해지거나 끊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너무 뜨겁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를 끊임없이 일으킨다. 우정과 애정, 사랑 따위의 감정, 그리고 연인, 영웅이나 삶의 인도자 등의 관계는 모두 이 같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틈새에 스며든 모든 관계들, 혹은 그 모든 것을 통틀어 무지개 같은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항상 사랑을 갈구하고 탐구한다. 어쩌면 그것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가 정의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시간과 공간, 실재를 초월한다. 경계 없는 무지개를 바라볼 때처럼 우리는 매 순간 사랑의 색을 새로이 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