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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ki Apr 28. 2022

선___________긋기

애증의 독서라이프

그동안 나의 책읽기는 온전한 깨끗함 속에 이어져 왔다. 

책 속에 그 어떤 밑줄과 메모도 남기지 않았고, 도그지어를 접는 것도 거부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따로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 놓기는 해도 책 본체에는 나의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책-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페이지들과 문장과 낱말들-이라는 ‘숭고한’ 영역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보았던 누군가의 sns 포스팅에서 그 또한 여태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어본 적이 없다고, 그것은 흰 눈밭에 발자국을 내는 것과 같다고 말한 부분에 크게 공감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하며 안도하기도 했다. 모든 물건을 깨끗하게 쓰고 싶어 하는 내 결벽에 가까운 성격 탓에 책마저 처음 상태 그대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도 있고, 신중하게 소유한 책 한 권 한 권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어느 누구라도 글이라는 것을 써봤을 테고, 책 한 권의 분량을 완성하는 것이 얼마나 존경스러운 일인지도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테다. 작가는 책상에 앉아 끝없이 고뇌하며 더 좋은 단어와 문장을 찾아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을 것이고, 편집자와 디자이너와 출판사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그 귀중한 시간들을 온전하게 엮어 내기 위해 작가의 글자취를 수도 없이 따라가고 배열하고 그려내고 뽑아냈을 것인데, 그 위에 나의 얼룩을 만드는 것이 마치 실례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책 한 권 읽는데 뭐 이리 거창한가 싶기도 하지만, 구매한 미술 작품에 우리의 손길을 더하지 않듯 책의 신선한 한 장 한 장을 처음 상태 그대로 보존해 주고 싶은 것이다. 능동적인 독서를 위해서는 책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라는 ‘독서 프로’들의 조언을 수차례 들어왔음에도, 난 왠지 그 문턱을 넘기가 어려웠다. 

책과 나 사이에 아주 가늘지만 명백한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글을 쓰기 시작하며 이러한 독서 습관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써야 하는 글이 아닌, 남을 위한 글도 아닌, 나를 위한 글. 오롯이 나를 표현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해왔던 터, 평소에 불쑥불쑥 떠오르거나 흩날리는 상념들을 깨작깨작 기록해 놓았던 휴대폰 메모장을 훑어보며 그것들과 하나씩 눈을 맞추고 더 깊숙이 파고들어 짤막하게나마 나의 이야기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내가 구김 하나, 티끌 하나 남기지 않으려 애쓰며 읽었던 그 책들은, 내가 직접 손짓을 하고 대화를 건네야 더욱 짙어지며 빛이 난다는 것을. 시선이 오래 머무르던 구절에는 연필로 길을 만들고, 가던 마음을 붙잡는 페이지 귀퉁이에는 고백하듯 내 생각을 적어내려 가다 보면 저자와 내 세상이 조금은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의 세상이 어디쯤인지는 몰라도 그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맞닿는 그 순간이 바로 숭고함일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넘겨본 그 책장들에는 나의 세계 또한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나는 다독가는 아니지만, 정독가이자 애독가이고 싶다. 

나는 책을 마구 사랑하기도, 질투하거나 아파하기도 한다.   


겨우 몇 그램 안팎의 책 한 장 한 장을 빼곡히 채우는 내가 알지 못했던 마음들과 사유와 역사를 선망하며, 그것들이 담긴 글자들을 정성스럽게 손 끝으로 짚어 가며, 때때로 내 가슴에 걸린 문장은 소리 내어 발음해 보며, 그러고는 마침내 행복한 탄식을 내뱉으며 책을 읽는다. 


한편 나는 여전히 집요하게 속발음을 하며 강박적으로 책을 읽는다. 이따금 그 모든 행위에 지쳐버려 머리맡에 쌓아둔 책들을 보기만 해도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질 때도 있다. 나에게 독서라는 행위는 행복감과 괴로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강박적인 독서 습관은 번역 일을 시작한 이후 더욱 심해진 것도 같다. 문장들을 훑어 나가며 느껴지는 감정 그대로를 마음에 담거나 필요한 정보를 습득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그 글이 어떤 어휘와 문체와 구조로 쓰였는지 완벽하게 흡수하는 행위에 집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해도 완벽하게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스스로를 점점 책으로부터 밀어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와 인물과 감정과 말들에 동화되고 싶은 나는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한동안 불면증이 심했던 지인이 해준 말이 있다. 잠을 못 자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잠을 빨리 자야 된다는 집착을 버리니 좀 괜찮아지더라고.


나는 그와 비슷한 이유로 책이 힘든 것 같았다. 책을 빠른 속도로 효율적이게 소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 책의 흐름과 나의 흐름이 일치해야 한다는 집착. 아직은 책에 연필로 선을 긋는 것이 조심스럽고, 문장들을 스치듯 읽어내려 가는 것이 어렵지만(책에는 버릴 문장이 없다!),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름의 노력들을 하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누구든 어느 시점에는 책을 읽는 행위에 있어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독서를 위한 독서를 하는 순간들을 경험할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에는 나처럼 속발음이 심하거나 난독증을 겪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독서는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어렵다.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책의 세계는 한 걸음씩 멀어지고, 나는 언제나 그곳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해 허덕일 것이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 따끈한 생동감을 일으키는 그 작고 네모난 물체로부터 그리 오래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책의 마법이니까.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 이전에 없던 아주 엷은 한 겹이라도 나에게 더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책 읽는 행위 자체의 순수한 즐거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읽기 전보다 조금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일지라도, 단 한 문장만큼 일지라도.


나는 이제 책과 나 사이에 선망과 분리의 선-긋기가 아닌, 연결과 이음의 선-긋기를 하기로 한다.






베르트 모리조, 독서(에드마 모리조의 초상), 1873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독서(모자를 쓴 안드레), 1918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 1769


찰스 에드워드 페루기니, 햇살 좋은 오후의 독서


알베르트 에델펠트, 소파에서 책 읽는 화가의 아내


책을 읽는 여인들이 등장하는 명화를 보면 그 낭만적인 풍경에 빠져들다가도, 저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을까, 저 시대에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까, 하는 약간 우스운 생각을 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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