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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ki Oct 12. 2022

노인의 벤치

지나간 시간, 그 삶의 무게

나는 지나간 시간들에서 삶의 무게를 느낀다.

그 시간은 한순간 한순간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그 기억에 깃들어 산다. 따라서 ‘순간’의 무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무겁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삶의 파동을 덤덤한 표정으로 살아내고, 지나온 순간들을 매일의 얼굴로 머금어 낸다.


나는 오지 않은 내일의 공기 같은 환상보다 내가 살았던 어제의 작고 조밀한 순간들을 가슴에 품고 산다.





얼마 전, 동네를 산책하다가 흰나비를 보았다. 

그날 오전에 집을 나설 때도 흰나비를 보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흰나비를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계속 멀어지기만 했다. 

내 앞에서 곡선을 그리며 팔랑거리는 형태가 너무 가벼워 불안정해 보였지만 나비는 최선을 다해 

단단한 날갯짓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하루에 흰나비를 두 번이나 보았으니 이건 분명 길조일 거야!라고 제멋대로 생각하며 어느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을 통과하고 있었다. 

문득 저 멀리 벤치에 뒤돌아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노부부의 뒷모습이었다. 

주말 오후 함께 산책을 나온 부부인지, 공원에서 마주쳐 우연히 같은 벤치에 나란히 앉게 된 

그저 두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걸음을 멈추고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한 가운데 그 그림 같던 장면을 

물끄러미 보았다.


내 앞에서 반짝거리던 흰나비를 떠올리며 오래된 두 사람의 무심한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문득 2020년에 들었던 김창완의 <노인의 벤치>라는 노래가 은근하게 들려왔다. 

집에 돌아와 그 노래를 오랜만에 꺼내 보았다. 


시간은 모든 것에 무관심했지만
추억을 부스러기로 남겼지
가끔은 생각이 나 지나온 날들이
그 시간들이 남의 것 같아


김창완 특유의 스스로에게 읊조리는 듯한 노랫말과 멜로디는 

어느 노인의 시선을 따라 물결치는 삶을 잠잠하게 그려낸 한 편의 독립영화를 듣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노래 속 흩어지는 피아노 소리, 거리의 불빛들, 흘러가는 사람들… 

우연히 산책하다 마주친 두 사람의 뒷모습은 왜 내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들은 어떤 무게의 삶을 지나온 것일까.


어제 또 흰나비를 보았다. 

지난번에 만난 이후로 좋은 일이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흰나비가 나를 스쳐간 순간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날의 햇살과 녹음을 떠올린다. 노인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묵직해진 마음의 무게를 다시 느낀다. 

나는 안락과 혼란, 행복과 불행 따위의 것들을 직접 살아내고도 내 삶의 관람자가 되어 한 발짝 떨어져 

그 장면들을 관조하고 싶다. 

최대한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싶다. 

그래야 그 순간들의 무게를 견뎌내고, 마침내 노인의 벤치에 앉을 수 있을 테니까. 

흰나비의 날갯짓처럼 단단하고도 가벼워질 수 있을 테니까. 






김창완 - 노인의 벤치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바람의 편지처럼

흩어지는 피아노 소리

아기손으로 만져 봤던 장난감 피아노

몸으로 스며들던 그 소리


추억을 부르는 바이올린 내게 여신이었지 그녀는

환상이 그녀를 지켜주었지

웃을 때마다 움직이던 입술의 점을 보았지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었으니까


시간은 모든 것에 무관심했지만

추억을 부스러기로 남겼지

가끔은 생각이나 지나온 날들이

그 시간들이 남의 것 같아


조금만 더 젊었으면 거리의 불빛들이

아마 아늑해 보였을 텐데

공원에 앉아 있었지 흘러가는 사람들

별은 점점 더 밝아지고


나이 든 여자가 다가와 앉아도 되냐고 물었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어

끈이 풀린 신발 위에 오래된 바이올린

그년 퀼트 가방을 메고 있었지


그렇게 우린 만났어 세월의 흔적처럼

노인의 벤치에 앉아서

날 보고 빙긋 웃었지 나도 그녈 보고 웃었어

주름을 볼 용기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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