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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여름 Sep 11. 2023

방학 때 띵가띵가 놀게 한 엄마의 이유 있는 야심

여름잠.

이레는 6학년 여름방학 동안 자신을 여름잠을 잔다고 표현했다.


밤 12시나 1시에 잠이 들면 다음 날 12시나 1시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깨어 있는 하루의 반도 아이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깨우지도 특별한 스케줄도 만들지 않았다. 하루 동안 방학 숙제 뭐 할 건지만 물어보고 한자를 한다고 하면 한자를 가르쳐 주고 수학문제를 풀겠다고 하면 답을 매겨 주는 일만 했다. 일주일 동안의 스케줄이라고 하면 금요일에 피아노 선생님 방문하시는 것과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 그리고 마음 내키면 일어나서 가는 줄넘기 학원이 아이의 방학 스케줄 전부였다.


나는 방학 동안 하루 20분~30분 내외의 방학 숙제 하는 시간 말고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맡겼다. 그렇게 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먼 길 통학하는 아이의 쌓인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저렇게 잠이 많은 아이가 40km가 넘는 학교를 매일 아침 일찍부터 오고 갔으니 얼마나 많은 피로가 쌓였겠냐는 말이지.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하하하..... 기다리는 거다. 뭐를? 아이 안에 있는 그 뭔가를.


이레는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기질을 타고났다. 날마다 피아노를 치고 새로운 곡을 만들길 좋아했다. 고작 2박 3일 휴가를 가 있는 동안에도 아이는 집에 가면 게임부터 할지 피아노부터 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학교 다니는 동안은 피아노 방과 후 학교, 피아노 학원, 방문 피아노까지 총 3명의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웠다. 방과후 피아노가 있는 날이면 레슨만 총 3시간을 했다. 아무리 피아노를 좋아해도 힘들지 않을까 싶어 아이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엄마, 피아노 배우는 건 저한테 힘든 일이 아니에요."


아이의 예술성과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서 나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예술은 다듬는 것보다 솟아나는 게 먼저다. 자신 안의 뭔가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필요한 양만큼의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책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는 심심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와 비슷하게 시간이 팽팽 남아돌고 심심함에 몸부림쳐야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할 것 같았다. 하루 종일 게임만 할 것 같은 걱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번 지켜보기로 했다.

 

정확하게 2주 반 동안 아이는 하루의 반은 자고 반은 게임이나 피아노를 치면서 게으른 백수처럼 보냈다. 내 안에 확신이 있었던 건지 이상하게 아이가 영어 단어 하나 안 외우고 있어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뭐, 이번 방학 아니면 다음 방학도 있으니까. 그러다 예기치 않게 내가 가벼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아이의 잠재력이 드디어 깨어나기 시작했다.


"엄마, 제가 유튜브 보고 악보를 만들었어요."


아이가 작곡을 하는 것을 알고 몇 달 전 나는 악보 만드는 프로그램을 깔아 주었었다. 꼭 하라는 말도 없이 그냥 깔아 주기만 했다. 처음에는 어려운지 관심도 별로 없더니 나 없는 동안 혼자서 유튜브로 공부를 했나 보다. 드디어 놀다 놀다 지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쉴 만큼 쉬고 놀만큼 논 아이는 그동안 충전된 에너지를 뿜어 내듯 무서운 집중력으로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3박 4일 동안 무려 5곡을 만들었다. 남편 말로는 하루 8시간 동안 악보를 만들기도 했단다. 8시간이면 깨어 있는 12시간 중에 4시간 뺀 시간이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아이가 만든 악보를 본 나는 아이에게 특급칭찬을 했다. "미친놈!" 이 곱게 미친놈 좀 보게.

나의 칭찬(?)에 한껏 고무된 아이는 더욱더 신나게 창작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레는 자신이 만든 곡마다 자세한 해설을 달기 시작했다. 곡의 조성이나 빠르기의 변화는 물론 곡의 분위기와 연주 난이도를 자신만의 표기법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악보 그릴 때의 난이도와 악보 그리는 데 걸린 시간까지 꼼꼼히 표시해 두었다. 평소에도 연주할 때 건반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다 쳐대는 스타일이라 악보 속 음표들은 오선보의 천장을 뚫거나 지하 깊은 곳까지 처박히고 있었다. 양심은 있었는지 어떤 곡은 실제 연주 불가능이라는 해설도 달렸다.

 

이레의 음악은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게임 음악에 가까웠다. 게임을 워낙 많이 하기도 하지만 아이는 지금 게임 음악 자체에 빠져 있는 듯했다. 통학하는 차 안에서 주로 듣는 음악들도 클래식 아니면 게임 배경 음악들이었다. 아이는 게임 음악을 단순한 게임용 음악이 아니라 또 하나의 예술 장르로 느끼고 있었다.


한 가지 웃기는 것은 방학 동안 영어 공부는 깔끔히 포기한 이레인데 만든 곡 제목들은 전부 제목부터 부제까지 영어라는 것이다. 파파고 찾아가면서 그럴듯한 제목들을 붙여 놓았다.


"이레야, 이건 제목이 무슨 뜻이야?"

"심연의 골짜기"

"심연이 뭔데?"

"깊은 어둠요."


어려운 단어들로 제목을 붙인 게 백 프로 허세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개학을 하자 아이는 방학이나 여름잠 따위는 원래 없었던 듯 예전으로 돌아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 또다시 바쁜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했다. 완성한 6갠가 7개의 악보를 전부 뽑아 방학 숙제로 제출하고 졸업식에 연주할 곡도 만들어 보라는 선생님의 제의를 기쁘게 받아 왔다.


나는 아이가 방학 동안 가슴 뛰는 무언가를 위해 열정을 불태워 보았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다. 이곳저곳 다니며 밖에서 듣는 소리 말고 홀로 심연의 골짜기를 거닐며 내면의 작고 깊은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뭉클하다.


아이를 방학 동안 띵가띵가 놀게 한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약 방학 끝날 때까지 아이가 여름잠만 잤다고 해도 나는 후회 없이 다음 방학을 또 기다렸을 것이다. 어릴 때는 노느라 바빴고 조금 더 있으면 공부하느라 어쩔 수 없이 바빠질 것이다. 그럼 언제 아이는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반 아이들에게는 방학 동안에도 규칙적으로 생활해야 한다고 강조해 놓고 내 아이는 깰 때까지 자고 잘 때까지 놀게 하는 것이 모순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누가 보면 방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날마다, 매 순간 아이를 관찰하고 아이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스스로 타오르게 가만히 두는 것이다.


우리 아이와 같은 성향을 가진 아이가 세상에는 수없이 더 많을 것이다. 그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는 많은 아이들이 방학 때는 좀 쉬었으면 좋겠다. 어중간하게 쉬는 거 말고 심심해서 미칠 만큼 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내 안에 어떤 에너지가 있는지,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알게 되면 좋겠다. 그건 부모도 알려줄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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