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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여름 Jan 09. 2022

600km를 달리는 사나이

중 1인 이안이가 방정식을 배운다. 

학교에서 방정식을 처음 배운 날 이레에게 '방정식이 뭔지 알아? 방정식이란...' 하면서 상대가 듣든 말든 자신의 머릿속에 든 것을 쏟아냈다. 선행을 하지 않은 아이의 장점이다. 


하지만 공부는 방향성도 중요하지만 그 양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이안이는 학습동기, 공부 체력은 높은데 비해 쌓아 온 공부량이 많지 않다는 것이 가끔 나를 초조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이가 어느 날 수학 학습지를 가지고 왔다.

선생님이 내어 주신 문제들인데 반 정도는 혼자 풀고 반 정도는 숙제로 남겨 왔다. 즉, 어려운 문제들만 남아 있다는 말이다.

모른 척하고 싶은데 역시나 아이는 나를 옆에 앉혀 놓고 숙제를 시작한다.


아무리 내가 교사라지만 방정식을 배운 지 30년이 지났다. 차분히 보면 생각이야 나겠지만 나는 다시 공부를 하고 싶지 않다. 몸도 피곤하고 솔직히 풀 자신도 없다. 그런데도 엄마인 죄로 아이 옆에 볼모처럼 앉았다.


처음 한 두 문제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역시 나이가 드니 그땐 없었던 통찰력이 조금 생긴 건가? 

그런데 두어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간다. 일정한 속도로 빨리 가면 늦게 갈 때보다 20분 빠르게 도착할 수 있다는데 그럼 도서관까지 거리가 얼마겠느냐?'대충 이런 문제다.(뭔가 하나 빠졌는데 기억이 안남)


5km를 자전거로 가면 몇 분 걸리는지 묻는 문제에 직접 자전거로 달려 봤다는 '수학은 정말 어려워' 그림책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이안이가 먼저 풀었다. 

그런데 식을 세우는데만 너무 집중하다 보니 그만 20분을 20시간으로 계산하고 말았다.

속도가 시속으로 나오면 시간도 분에서 시간으로 고쳐줘야 하는데 아이들이 가장 많이 실수하는 부분 중 하나고 출제자가 자주 놓는 덫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답이 600km. 뭐? 600km라고? 도서관이? 내가 옆에서 빵 터져서 웃었다.


 "무슨 도서관이 그렇게 멀어? 도서관이 서울에 있어? 거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다고? 낄낄낄"


황당하기는 이안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러게요. 저는 중국에 있는 줄."


둘이서 한참을 배를 잡고 웃었다. 다행히 오류를 발견하고 정답을 구했다. 그래도 10km가 나온다.

10km를 자전거로 왕복하며 책을 빌려 온다고? 제시된 속도로 가면 자전거로 40분에서 1시간 거리다. 그 정도로 책에 빠진 학생이 있다면 걔는 진정 성공할 애다.


다음 날, 나는 진주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를 확인해 봤다. 거의 300km 거리다. 이 도서관은 이안이 말대로 중국에 있는 도서관이 확실하다. 이안이와 이 일을 이삼일 동안 곱씹으며 웃었다. 아니 내가 좀 놀렸다.


 "아니, 600km 떨어진 도서관도 자전거로 다녀오는 애가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 아냐? 히히"


600km 떨어진 도서관 말고도 그날 안갯속에 놓인 것처럼 길을 바로 찾지 못한 문제 때문에 우리는 2시간을 넘게 씨름했다. 방정식이 괜히 방정식이 아닌 것이다.

나의 강력한 비밀병기인 답지가 없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은 나에게도 공포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풀어냈다.(포기할 수가 없다. 너는 숙제라서. 나는 명예가 걸려서..)


아버지와 아들 나이를 묻는 문제에서 아버지 나이가 15살이 나올 때도 깔깔거리며 웃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벌써 애를 낳았다면서.. 


다음 날 이안이는 수학 문제집을 폈다.

학교 갔더니 답은 다 맞았는데 접근하는 방식은 조금 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선생님은 배운 것은 그날그날 복습해야 자기 것이 된다는 주옥같은 말씀을 심어 주셨다.(내가 말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그래서 이안이가 수학 문제집을 편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하나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진짜 문제집으로 복습하는 아들의 모습이었고 또 하나는 어젯밤 우리를 그렇게 괴롭혔던 문제들이 문제집에 그대로 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상세한 설명과 식 세우는 방법까지....

배 타고 건너갈 걸 우리는 온몸으로 물장구치며 죽을 동 살 동 건너간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정석이고 아이에게 도움은 되겠지만 나는 무슨 죄...?


이안이는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비슷한 문제들을 찾아 풀었다. 

그래, 출발이 조금 느리면 어때? 포기하지 않으면 되지. 그리고 사실 이안이가 늦게 출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 일찍 출발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름방학이 되어 나는 처음으로 이안이에게 과외 선생님을 붙였다. 돈을 쓰고라도 아들 공부에서 손을 떼고 싶었다. 그런데.... 과외 선생님이 내준 숙제 때문에 난 또 밤마다 이안이 옆에 앉아 있다. 영어 받아쓰기 좀 불러 달라고. 하...웃어야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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