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엄마, 운동은 아빠다. 이안이가 성격 좋은 것은 아빠 닮아서고 이레가 감성적인 것은 엄마를 닮아서다. 아빠는 공부 잘 못했다는 것을 쿨하게 인정하고 나는 몸 쓰는 데는 젬병이다. 운동신경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운동 자체를 싫어한다. 아빠도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했다고 해주자.
그 외에는 닮은 구석이 별로 없다. 저 먼 명왕성에서 온 '아들'이라는 새로운 종족일 뿐이다. 그래서 '넌 누굴 닮아서 ~도 못하니?'라는 말을 해 본적이 없다. 하지만 아직 입 밖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이안이가 나의 단점을 그대로 이어받은 면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느린 똥손'
나는 그림을 정말 못 그린다. 만들기도 잘 못한다. 게다가 느리다. 중학교 때 블라우스를 만들 때도, 뜨개질을 배울 때도, 교원 연수를 가서 간단한 작품을 만들 때도 다른 사람들이 다 끝내고 난 뒤 마지막까지 남아서 뭔가를 꾸역꾸역 하고 있던 것이 나다.
나는 그때의 초조함과 열등감을 기억하고 있다. 내 자존감의 평균치를 낮추는 데 막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다. 어느 날 이안이가 그런 내 손재주를 닮아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다.
내 어두운 그림자가 이안이에게도 옮겨갈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수시로 체험활동을 한다. 요리, 발레, 연극에서부터 드론, 로봇, 코딩 등 정말 다양한 분야의 강사들을 초빙해 학교에서 체험을 했다. (작은 학교에서는 큰 학교에서 책으로만 배우는 것을 실제로 배워보는 활동이 꽤 많다. 왜 엄마들이 작은 학교 보내는 것을 망설이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안이가 5학년 때 도서관에서 로봇손 만들기 체험활동이 있었다.
두꺼운 종이로 손가락을 관절 단위로 잘라내고 신경과 근육 역할을 하는 줄을 마디마디 연결해서 손가락이 펴졌다 구부려졌다 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수업이었다.
여러 학년이 함께 하는 수업이라 나도 우리 반 아이들을 데리고 같이 참여했다. 아이들은 대부분 잘하고 있어서 교사가 도움을 줄 일은 크게 없었다. 이럴 때 보면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조작활동도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영혼 없는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리고 있던 아이도 이런 수업에서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탁월한 실력을 보여 주었다.
로봇손을 다 만든 아이들은 자신의 작품으로 장난을 치며 하나둘씩 교실을 빠져나갔다.
고학년 위주로 먼저 빠져나가고 이안이 보다 어린 우리 반 아이들도 모두 나가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커다란 도서관에는 물건을 정리하는 강사와 이안이 담임과 내가 남았다.
이안이는 아직도 어느 단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듯했다. 친구들 다 떠나 혼자 남은 이안이와 내 어린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다른 아이가 남아 있었으면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괜찮으니 천천히 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왜 하필 네가 마지막인거니. 지금 저 아이는 얼마나 초조하고 답답할까. 나처럼 열등감의 그늘 속에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느긋한 담임과 달리 나는 이안이 주변을 돌며 어서 빨리 완성하기를 바랐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아이는 내 도움을 거절했다. 그리고 50분 같은 5분이 더 지났을 때 아이는 혼잣말로 속삭였다.
"대성공이다"
그러고서는 자기가 만든 로봇손을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이에게 자신이 맨 마지막까지 남았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남들 다 하는 것 제일 늦게 끝냈는데 대성공이라니. 여름철 장마처럼 우중충한 비가 내리던 마음에 햇살이 스며들었다. 쭈글거렸던 내 마음의 주름이 펴졌다.
아이에게서 나의 부족한 모습을 보는 일은 참 힘든 일이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미안하고 화가 난다. 나처럼 되지 말라고 다그치고 최대한 고쳐 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이가 가진 재능이나 기질들은 나에게서 나왔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 아이는 나와 다른 또 다른 인격체고 아이가 가진 장단점은 내 것이 아니고 아이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