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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서 Jan 08. 2024

무엇이 나와 그대들을 살게 하는가.

부제: 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1. 타인은 나에게 다가와 타자가 되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스틸컷

  사실 나는 영화와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다. 어쩌면 문학 전반과 친하지 않다. 기존에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일은 많이 접했지만, 문학 관련 도서는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 철학이나 신학, 역사학 같은 문학 외의 인문학을 더 좋아했다. 그런 나에게 이번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강한 끌림을 주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은 나의 인생에 항상 함께 하였다. 프런티어학부대학에서 이러한 주제를 발표하는 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도 질문의 동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질문은 나뿐만이 아니라 철학사에서도 중요하게 논의되어왔던 질문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와 함께 제기되어 철학사적 질문의 축을 이룬다.

  인간에게 '사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러나 '잘 사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늘 문제에 봉착한다. 그것은 나의 내부에 존재할 수도 있고, 나의 외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타자'라 칭하고 싶다. 우리 내면에 그것이 들어온 이상, 이것은 외부에 존재하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 마치 '타인'과도 같은 -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 '자(者)'의 형태를 갖추어 우리에게 인식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타자(他者)의 범위를 단순히 인간에게 국한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타자는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를 비롯하여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이는 다시 돌아와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것은 변증법에서의 반(反)의 개념을 가져와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서두에서 내가 이러한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영화는 내재적으로나 외재적으로나 타자의 수용으로 인한 자아의 내적 성장, 변증법에서의 정과 반의 대립을 넘어선 합의 도래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메시지들을 해체해가며 우리 삶에 대한 고찰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2. 무덤 위에 핀 꽃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宮﨑駿)는 1941년 전란 가운데 태어나 3살 때 전쟁을 피해 시골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의 큰아버지는 ‘미야자키 비행기’라는 이름의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 공장에서 주요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정의 경제적인 형편은 매우 좋았었다. 어쩌면 그가 예술 분야로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도 경제적으로 좋은 가정환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적인 부가 어디서 창출되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태평양 전쟁으로 창출되고, 또 전쟁 이후에는 한국전쟁으로 창출되었다. 즉 미야자키 하야오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군수산업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반전주의자였음에도 전쟁 특수(特需)로 돈을 번 것을 떠벌리고 다녔었다. 그는 대학생 때 아버지에게 ‘전쟁부역자’라며 말다툼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또 다른 불편한 기억은 어머니였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머니는 그가 6살 때부터 폐결핵으로 인해 9년 동안 침대에 누워있었고, 초기 몇 년 동안은 계속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애니메이션 영화 <이웃집 토토로>에는 미야자키가 그 시기에 느꼈던 암담함, 무력함, 괴로움,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어두운 면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주인공은 대부분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나 나오지 않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 대신에 그는 ‘소녀’ 등장인물에 모성을 주입시켜서 자신의 이상적인 어머니상을 투영시킨다. 그의 작품 속 모성에 대한 인식은 극단적으로 표현되어 그가 추구하는 모성은 소녀라는 캐릭터 속에 이상적으로 드러난다. 이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주인공이 어머니를 잃은 사건을 시작으로 영화를 전개한다. 기존 영화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를 반영하는 모습이 많이 나오지만, 이번 영화는 특히나 그의 인생을 담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자전적(自傳的)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에게 타자는 군수산업을 하며 타인의 피값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아버지도, 행복한 유년시절을 함께 있어주지 못한 어머니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계속 ‘반전주의’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도 그 모든 예술 활동의 기반이 되었던 환경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전쟁 특수 위에 성장한 반전주의자만큼, 무덤 위에 핀 꽃만큼 모순적인 표현은 없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잃은 어머니 역시도 그의 가슴 한 켠에는 항상 남아있었다. 수 많은 작품들을 통해서 표현되고 드러났지만 영화에서 이를 직면하는 모습은 잘 보여주지 않았었다. 그 동안의 작품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타자들을 배경으로 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주인공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는 자신이 그토록 외면하고자 했던, 치유하고자 했던 타자와의 직면을 통해서 그가 극복해온 삶의 궤적을 그린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3. 나 자신을 향한 무한한 환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스틸컷

#용서

  영화의 주인공 마히토 역시 아버지가 군수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이고, 어머니를 잃은 설정으로 등장한다. 다만 다른 작품은 어머니를 잃은 ‘설정’이라면, 이 작품은 어머니를 잃었으나, 찾아가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탑을 통해 이세계(異世界)에 가기 전까지의 주인공의 모습은 매우 혼란스러워 보인다. 어머니를 잃은 당시의 모습이 그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게 되어 꿈은 물론이고 현실에서도 환상으로 보이게 된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도 존재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나 자신’이었다. 아들로서, 그리고 ‘남성’으로서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모습은 자기 자신에게 큰 분노로 다가왔다.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태연한 ‘아버지’의 모습도 미움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죽은 마히토의 어머니 대신 그 동생(마히토의 이모)과 재혼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새어머니와도 통하게 되는데, 그가 영화에서 새어머니에 대해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그러하다. 초장에서 그는 매우 격식있고, 예의 바르고, 마치 어린아이 같지 않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부분이 그의 혼란스러운 내면과 대비되어 모순을 이룬다.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태연하게 새어머니를 맞이한 아버지를 향한 분노는 피란 이후의 삶에서의 적응을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학교에 가서도 잘 지내지 못하고 반 아이들과 싸우고 오게 된다. 학교에 가기 싫어 스스로를 자해하기도 한다. 그의 자해 행위는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미운 아버지, 새어머니, 그리고 ‘나 자신’이라는 타자에 대한 거부였다. 그러던 그가 조금씩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어머니의 유품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어머니는 주인공에게 요시노 겐지부로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책을 남겨주었다. 이 책은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어머니가 감독에게 선물해준 책이기도 하였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이 모든 이야기가 ‘자전적’ 스토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은 어머니가 남긴 책을 읽으면서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조금씩 용서하기 시작한다. 

  마히토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는 이세계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영화 속 이세계는 일종의 영원의 공간으로 현재의 시간선이 ‘영원히’ 존재하는 그러한 공간이 아니라, 모든 시간선이 한 자리에 모이는 공간이다. 즉 시간의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영원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만난 어머니는 ‘히미’라는 이름으로 불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어머니의 어린 시절의 시간선에서 왔기 때문에 주인공 마히토와 비슷한 나이로 보인다. 마히토는 이세계를 떠나기 전에 히미에게 다시 원래 시간선으로 나가게 되면 죽게 되니 가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히미는 마히토를 낳게 되는 것만큼 대단한 일은 없다며 나서게 된다. 결코 용서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용서되었다.


#포용

  영화의 절정 부분에서 조금 재밌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바로 ‘악의’라는 개념이다. 탑의 주인공인 큰할아버지는 – 마히토에게는 외증조 할아버지이다. - 마히토에게 돌을 건내주며 이 돌을 쌓으면 세계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히토는 이 돌에는 ‘악의’가 깃들여있다며 거부하게 되는데, 큰할아버지는 그것을 알아차린 점이 마히토를 선택한 이유라고 한다. 이후 우여곡절을 통해 다시 만난 큰할아버지는 악의에 물들지 않은 13개의 돌을 제시하며 세계를 지키기 위해 탑을 쌓으라고 한다. 그러나 마히토는 다시 한번 거부하게 되는데, 자기 자신이 ‘악의’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자해 흉터를 보여주며 자신의 ‘악의’를 인정한다. 여기서 악의는 내재적으로, 또 외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내재적으로 악의는 주인공의 ‘타자들’이다.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던 ‘자기 자신’부터 태연한 듯 새로운 부인을 맞이한 ‘아버지’까지, 타자에 대한 분노는 자해를 통해서 드러났으므로 그 자해 흔적은 곧 타자와 연결될 수 있다. 그런 마히토가 나는 ‘악의’에 물들여 있다라고 고백한 것은 타자를 수용하게 되었고, 삶의 반(反)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즉 자신이 그토록 거부하려고 했던 모든 반(反)과 타자들을 이제 내 삶으로 포용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직면

  외재적 관점에서는 우리 역사와 연관지을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가장 추악한 면을 보기 전까지,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을 향한 기대에 차있었다. 우리의 이성은 위대하며, 그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역사는 계속 진보할 것이고, 더욱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더 좋은 결말을 맺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것은 비참하게 죽어가는 유대인들이었으며, 죽어가는 아이들과 고통 속에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정(定) 속에 내재된 반(反)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이것을 직면하려하지 않고, 철저히 외면하며 돌을 쌓아올려만 갔다. 반(反)에 대한 철저한 외면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갔다.

  감독의 삶도 그러한 역사적 배경 위에 세워졌다. 앞서 말한 ‘무덤 위에 핀 꽃’처럼, 그가 예술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전쟁이라는 비극 위에서 이득을 취했기 때문이다. 감독을 투영한 마히토가 자기 자신의 ‘악의’를 인정한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 전쟁 특수 위에 세워진 감독의 일생이라는 타자의 얼굴을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돌의 개수와도 직결되는데, 총 13개인 악의 없는 돌은 감독이 지금까지 제작한 작품 수와 일치한다. 악의 없는 – 전쟁에 반대하고, 군국주의를 비판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 그의 작품은 전쟁 특수 위에 세워진 ‘악의’ 있는 감독의 손으로 창작된 것이었음을, 감독 스스로가 영화를 통해 고백하고 직면하게 되었다.

  타자(他者) 철학의 대가인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 Emmanuel Levinas)는 타자의 얼굴을 직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자의 얼굴을 들여다 볼 때 우리는 비로소 환대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를 외면하고 살아가는가. 우리 모두에게는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이상향과, 그럼에도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나 자신 사이의 괴리감은 우리로 하여금 괴롭게 만든다. 그러나 삶은 그 두가지를 모두 포용한다. 우리는 한 면만 나라고 생각하고 다른 한 면은 철저히 무시하지만, 삶은 그렇게 냉정하지 않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타자는 외부에 있지 않고, 나의 자아 속에 있기 때문이다. 타자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받아들인 감독처럼, 마히토를 받아들인 주인공처럼.


4. 그러자 예수가 답했다.

  돌 쌓기를 거부하는 마히토에게 큰할아버지는 현실세계로 돌아간다면 그곳은 전쟁과 폭력이 점철된 불바다일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마히토는 이를 거부하고 그럼에도 그곳에서 살아가겠다고 한다. 자신을 도와준 왜가리 남자, 히미와 키리코와 같은 친구를 만들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친구를 만들면 불바다 같은 현실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친구는 어떤 존재인가? 친구의 가장 근원적인 본질은 ‘우정(友情)’이다. 우정에 대해서 혹자는 이것이 사랑의 다른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우정의 우(友)에는 벗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사랑하다’라는 의미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메시지로 이를 해석하자면, ‘사랑’하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스틸컷

  나는 이러한 영화의 메시지에 그리스도교적 해답을 조심스레 더하고 싶다. 성서의 마르코의 복음서(마가복음) 12장에서는 어느 한 율법학자가 예수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지 물어보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답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 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 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가12:29~31)

  예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첫째는 신에 대한 사랑으로, 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살라고 하였다. 이 두가지 내용은 구약 성서에서도 나오는 내용으로 성서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개념이다. 나는 이번 영화와 연관하여 두 번째 내용에 크게 집중하고 싶다.


  우리 세계는 영화 속 큰할아버지의 말처럼 불바다와 같을 때가 있다. 전쟁과 폭력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노가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앞서 강조한 것처럼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고, 이것을 직면해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는 ‘사랑’을 답했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을 실천하였다고 평가받는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었다.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 그 자체인 예수는 인간의 모든 죄값을 뒤집어 쓰고 십자가 위에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였다. 예수가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자, 근원이라 생각한다. 사랑은 그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자체의 수용’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고치려 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납(容納)’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에리히 프롬(1900~1980, Erich Pinchas Fromm)의 ‘소유와 존재’에 대한 아이디어를 빌려 ‘존재적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이를 타자 개념을 빌려 설명하자면, 예수는 예수의 입장(공의로운 신)에서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인 인간을 전적으로 용납하고 받아들였다. 그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악의로 가득찬 이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5. 지독한 나 자신을 흘러보내며.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우리는 때때로 나 자신에 실망한다. 감독이 무덤 위에 세워진 자신을 괴로워했던 것처럼, 마히토가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것에 괴로워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도 있다. 감독과 마히토 모두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미워하는 대상이었다. 그러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큰할아버지의 말처럼 악의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직면할 때 비로소 성장하게 된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 상황, 그리고 나 자신이라는 타자(他者)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인생의 가장 어두운 면, 반(反)을 직면하여 이를 지양(止揚, Aufheben)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인생 가운데 우리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사랑’을 하는 것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관계인 ‘친구’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자아 앞에 설 때에, 비로소 나라는 타자는 이해되고 더욱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삶을 살아온, 마히토가 삶을 사는, 그리고 질문의 대상인 ‘그대들’인 우리가 살아갈 방법일 것이다.


본 글은 필자가 모 대학의 문학 수업에 제출한 과제의 전문을 가져온 내용입니다.

저와 다른 모든 생각들을 사랑합니다. 서투른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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