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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Feb 20. 2023

고장난 'E'

230220




MBTI가 유행하기 한 참 전인 고등학생 때, 교회에서 MBTI 검사를 했었다. 나는 그때 ENFJ가 나왔다. 참고로 지금은 INFJ가 나온다. E가 I로 바뀌다니 이 얼마나 큰 변화인가. 나는 태어날 때부터 E였다. 학창 시절 내내 반장과 회장을 밥 먹듯이 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 갔던 야영에서는 무대에서 혼자 스탠딩 코미디를 했다. 그 때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아서 한동안 '개그맨'을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중학교 때부터 조금씩 인간관계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구질구질하게 일일이 적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눈물 없이는 듣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이 생겼다. 그렇게 20대 중반 무렵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돌아봤을 때는, 몸도 마음도 고장이 나있었다. 정신과를 다니게 되었고, 60kg대를 유지하던 몸은 100kg를 넘었다. 교회를 몇 년 동안 안 다녔고, 심각할 때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80kg대로 살을 뺐고, 교회를 다시 다니고 있고, 자살은 생각하지 않는다. 정신과는 아직도 다니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나의 'E'는 도무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당시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과 있을 때는 외향적이게 보인다. 그래서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I'라고 하면 놀라기도 한다.


가장 큰 예로, 우습게 들리겠지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대화를 할 때마다 긴장을 하는 편이다. 대화가 끝나고 나면 내가 실수한 것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기도 한다. 불만이 있어도 화를 잘 못 낸다. 마땅히 화를 낼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도 미안해한다. 갈등 상황에서 거의 대부분 나를 탓한다. 상대방을 탓하게 되더라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스스로를 계속 의심한다.


나는 'I'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I'는 'E'가 고장난 결과물인 것 같아서, 왠지 나쁜 것 같다. 이제는 나의 일부가 된 'I'를 사랑하고 싶은데 그러다가도 'E'들을 보면 그저 부럽다. 그만 소심하고 싶다. 지금 이 생각마저 소심한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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