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4
이유 없이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날이 있다. 이유 없이, 라기보다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이유를 숨기고 싶은 날이 있다. 평소의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그 이유를 스스로 잘 파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무명’이라는 작가명을 빌려서 털어놓자면, 지난 일요일 저녁부터 조급함이 커졌다. 함께 음악을 하는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온 직후였다. 그 친구들에게 자극을 받아서 그런지, 성공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친한 친구들의 연락도 귀찮게 느껴졌고, 교회에서 하는 봉사는 내게 도움이 되기는 커녕 방해만 되는 것 같았다. 아내와의 대화에서도 내내 시큰둥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존감이 떨어졌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물론 이 이유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아직도 나를 괴롭히는 작년 가을의 트라우마,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고 난 후 계속 꾸는 중학교 때 악몽, 망치질을 하다가 손가락을 다쳐서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된 상황 등. 다양한 이유가 떠오르지만, 아무튼 말은 하지 못했다.
오후 내내 자전거를 탔다.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신용산역에서 한강대로와 양화대교를 거쳐 합정역까지. 2시간 동안 바람을 맞고 땀을 흘리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합정역에서 잡지 ‘빅이슈 코리아’를 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판매원 분은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서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웃고 있었다. 나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