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6 ― 첫 향기, 첫 안도

멈출 수 있을 때, 그제야 비로소 시작된다

by 차가운무스탕

그 시절, 나는 모든 감각이 닫혀 있었다.
귀는 들리지만 말은 들어오지 않았고, 눈은 떠 있으나 초점이 없었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진료를 하면서도, 내가 누군지 모를 때가 있었다.
몸은 움직이는데,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아 흔들면, 그제야 ‘아, 내가 여기에 있었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나는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엔 망설였다.
나는 환자를 돌보는 의사였지, 상담을 받는 내담자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시기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모든 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병원에서조차 내 상태를 설명할 수 없었다.


상담실은 조용했다.
심리상담사는 내 이야기를 끊지 않았다.
그냥 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내게 던진 말은 아주 단순했다.

“지금의 ‘상황’과 ‘당신 자신’을 분리해보세요.”


그 한 문장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모든 문제를 ‘나의 실패’로 받아들였다.
주어진 환경, 부당한 구조, 사람들의 말조차 모두 내 탓으로 여겼다.
하지만 ‘분리’라는 단어는 내 머릿속을 멈춰 세웠다.
나는 상황의 일부였지만, 상황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건 마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나는 파도가 아니라, 그 위를 떠 있는 사람’*이라고 깨닫는 순간 같았다.


이 깨달음은 향기보다 먼저, **‘행동의 변화’**로 이어졌다.
나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건 무기력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도망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일시 정지’였다.
그날 이후 나는 병원을 잠시 떠났다.
서류를 정리하고, 연락을 끊고, 집 안에서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침대 위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엔 불안했다.
머릿속에서 ‘이렇게 쉬면 더 망가질 거야’라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저 들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점점 작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 깨달았다.
나를 무너뜨린 건 일이 아니라, 멈출 수 없었던 나 자신이었다.


그날, 창문을 열었다.
공기가 들어왔다.
향을 피운 건 아니지만, 공기 그 자체가 향기처럼 느껴졌다.
차가운 공기 속에 먼지, 나무, 흙, 그리고 아주 희미한 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향기가 아니라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그건 인공적인 향보다 더 깊고, 더 단단한 위로였다.


이후 상담은 나의 새로운 루틴이 되었다.
한 주에 한 번, 내 마음을 해부하는 시간.
상담사는 내 말을 듣다가 종종 물었다.
“지금 그 생각은 누구의 목소리인가요?”
그 질문은 나를 멈춰 세웠다.
그건 상사의 목소리였고, 세상의 기준이었고, 내가 스스로 만든 공포였다.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몸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조금씩 ‘자율신경의 행동인지(behavioral cognition)’를 체득했다.
몸의 긴장을 의식하고, 그 신호에 따라 행동을 바꾸는 법.
이를테면, 심장이 빨라질 때 억누르지 않고 자리를 이동하거나,
입이 마를 때 스스로의 어깨를 풀어주는 것.
이건 향기보다 먼저 찾아온 ‘몸의 언어 회복’이었다.


그즈음 나는 처음으로 신경과 치료를 받아보기로 했다.
그전까지는 ‘정신과나 신경과를 가면 약만 준다’는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 편견조차 버릴 만큼 지쳤다.
진료실에 앉아 담당의사가 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이상하게도 ‘이제 진짜 치료가 시작됐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건 약 때문이 아니었다.
도전할 마음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회복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향기를 다시 꺼냈다.
이전처럼 불안 속에서 찾은 ‘진정의 향’이 아니라,
‘이제 괜찮아질 거야’라는 약속의 향이었다.
라벤더에 제라늄을 한 방울 섞었다.
부드럽고 단내가 나는 꽃향기.
그건 새로 시작하는 마음의 냄새였다.


나는 그 향기를 맡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싸우지 않아도 돼.”


그날 밤, 오랜만에 숙면을 했다.
심장은 고요했고, 호흡은 따뜻했다.
향이 마음속으로 스며들면서, 나는 처음으로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이건 라벤더 때문이 아니라,
‘멈춤을 허락한 나 자신’ 덕분이었다.


향기는 내게 말해주었다.
“너는 드디어 네 삶의 향을 되찾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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