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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이 Sep 23. 2021

파타야를 향한 공포

14년도 여름 남동생과 함께한 동남아 3주 여행 中


찐득찐득한 침대 위에서 번쩍 눈을 떴다. 괜히 마음이 서글퍼 이틀 내리 자기 전 아까운 눈물을 흘렸다. 엄마에게는 징징거리지도 못 하고 같이 있는 동생에겐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 눈물을 삼키는 안타까운 밤이었다.


새벽에 도착한 방콕은 번쩍번쩍했다. 소문대로였다. 얼마나 많은 블로그에서 카오산 대로에 대해 포스트 했는지. 나보다 이틀 먼저 방콕에 들어온 오빠는 밤이면 밤마다 정보를 내놓으라는 내 카톡을 가볍게 씹고 새벽깨나 되어서 답장이 오곤 했다. 길거리가 술집이라고 했다. 사실이긴 했다. 삐까번쩍한 길목을 등지고 동생과 나의 숙소가 거기 있었다.


동생은 해외여행이 처음이었다. 생애 첫 해외여행의 숙소로 치기에는 좀 그런, 좀 많이 그런, 숙소가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러한 쪽박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첫번째는 우선 동남아 물가에 대한 인지가 제로에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싸다고 해서 그냥 싼 건 아니라는 것. 가격의 저렴함에는 이유가 있다는 걸, 나는 완벽하게 배제했다. 두번째 이유는 첫 유럽 배낭여행에서 겪었던 숙소에 대한 고통을 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추억으로 미화시켰다는 것에 있다. 그런 경험을 뒷받침하지는 못할 망정 그 때와 비슷하게 숙소를 무작정 정해버린 것이었다.


우리 숙소는 뭐랄까, 영화 속에서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방랑객이 돈을 아끼기 위해 고르는 숙소로는 그림이 그럴듯 하게 나올만한 곳이었다.


동생은 경악한 것치곤 금새 적응을 했다. 오히려 적응을 못한 건 나였다. 나는 동생 몰래 서글픔의 눈물을 흘렸다. 밖에 나오면 개고생이라고, 딱 그짝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내동댕이 쳐진 기분. 첫 날의 일기는 온통 욕 뿐이었다. 그 와중에 엄마는 우리 둘을 보내고 저 멀리 한국에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잘 도착했니? 숙소는 괜찮지? 내 답장은 일기와 다르게 웃는 이모티콘과 웃는 사진들, 그리고 재밌다는 대답뿐이었다.


다음 일정은 파타야였다. 상황적 고통 덕분에 날짜가 다가올수록 또 다른 저항감이 커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이 놈에 타일랜드를 떠나고 싶었지만, 싼 맛에 끊어놓은 저가 항공권이 일정변경이나 캔슬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파타야의 숙소는 내게 아주 중요했다. (모든 숙박시설을 정했던) 나에 대한 떨어진 위신을 되찾아야 했고, 더 이상 추잡스러운 곳에 눈물 바람으로 잠들고 싶지 않았다. 방랑객이 살만한 숙소는 3박이면 충분했다.


파타야 숙소를 그때부터 찾을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숙소는 부킹한 상태였다. 저렴한 프로모션으로 가격도 다 지불했기 때문에 숙소 변경은 되지 않았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을 체감했지만, 현대의 비지떡은 맛이 있다고 하니 그 말 대신 싼 게 저가항공권 혹은 싼 게 저려미 프로모션 이딴 말로 비지떡을 대체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빌어먹을) 구글맵에 숙소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구글이 제공하는 좋은 서비스 중 하나인 거리를 가보지 않고도 체험하는 그 구글 지도 속에 숙소 대신 이상한 이름의 잡화점이 있었단 소리이다.



내 손톱은 나날이 짧아져갔다. 밤마다 물어뜯으니 남아날 일이 없다. 있어야 할 자리에는 숙소 대신 이상한 이름의 가게가 있었지만 인터넷 세상 속에서는 숙소에 대한 후기가 많이 나왔다. 영어로도, 러시아어로도, 중국어로도 있었다. 사실 많지는 않고 네다섯개가 있었다. 후기들은 다 최근에 작성된 거라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pool 이라고 쓴 부분이 자꾸만 fool 이라고 읽힐 정도로 멘탈이 아작 났다. 네이버에 몇 번이나 단어 검색을 하고 나서도 성이 차지 않았다. 숙소에 대한 후기는 있는데, 구글맵에는 숙소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숙소를 부킹한 사이트 cs 팀에 전화를 부탁했다. 내 황당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여러 번 cs 팀에 메일을 보냈지만, 아직 답이 없는 상태였다. 태국에서는 도저히 한국 서비스 센터랑 통화를 할 수 없고, 외국어 등급 5등급의 나와 수능도 보지 않은 내 동생이 태국 서비스 센터랑 통화를 할 수 있을리가 없다. 3분간의 짧은 통화를 끝낸 친구는 구글맵에 없다는 이유로 이미 지불을 다한 호텔의 부킹을 캔슬해줄 순 없다는 말을 전해왔다. 선택지는 두 개였다. 일단 찾아가서 그 자리에 숙소가 있기를 바라거나, 숙소를 예약한 돈을 다 날리거나.


돈 좀 아끼자고 저가 항공권에 저렴한 숙소에서 3박을 울며 지낸 나에겐 청천벽력이었다. 친구에겐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지만 실망감을 숨길 수가 없어서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처음엔 도움을 주지 않는 숙박 사이트에 화가 났다. 아니면 숙소가 있는지 숙소에 전화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거기까지는 자기 권한이 아니라는 말만 돌아왔다. 현지에 가서 숙소가 없을 경우 돈을 돌려주겠다는 말과 함께 현지에서 통화를 해보라고 충고했다. 멘탈이 아작난 나에겐 차가운 답변이었다. 지금이라면 방콕 숙소 직원에게 이 숙소에 전화 한 번 해줄 수 있겠느냐 부탁을 했겠지만, 그때는 리터럴리 뇌세포가 부족했다. 그렇게까지 사회성이 길러지진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 두 남매에게 가장 부족했던 건 센스와 눈치 항목이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파타야행 버스를 탔다. 내가 골라둔 숙소가 없을지도 모르는 공포의 순간에도 잠이 왔다. 다음 숙소가 그렇게 걱정이 되었는데도 버스 안에서 잠을 잘 수가 있다니. 그 부분에선 나도 내 자신에게 놀랬다. 의외의 비범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파타야는 방콕에서 멀지 않았고, 도착하자마자 썽태우 기사들이 우리를 서로 데려다주기 위하여 우리 남매에게 다가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썽태우 기사에게 숙소 이름을 알려줬다.


"um.. where?"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건 잘생긴 사람을 보고 첫 눈에 반할 때나 드는 기분이 아닌가. 기사는 숙소를 몰랐다. 슬쩍 동생의 눈치를 봤다.


"그래도 일단 가보자. 여기까지 왔는데."


돈을 돌려받더라도 일단 가봐야 돈을 돌려 받지 않겠냐는 동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썽태우 기사에겐 숙소 이름 대신 위치를 설명했다. 위치를 열심히 들여다보던 썽태우 기사가 드디어 okay를 했다. 몸체만한 짐을 들고 썽태우에 올라탔다.


버스 터미널을 나서자 도로엔 파타야의 분위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파타야 하면 생각나는 그런 화려함과, 야자수, 맑은 바다와 넓은 해변가가 아니었다. 내 파타야는, 낡은 술집들이 더 낡은 네온사인에 번잡하게 얽혀 있었다. 더군다나 어두워지지 않은 한낮엔 오래된 공장의 정유 파이프를 보는 것 같았다. 먼지와 기름으로 찌든 그런 파이프들.

길거리엔 먼지가 휘날렸고 제대로 도보가 마련되지 않아 아스팔트 위를 사람들이 걸어다녔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무료함과 더움에서 비롯된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먼지와 함께 천자락을 날리며 썽태우가 달렸다. 쌩쌩 달릴 때는 잠시동안 기분이 좋았다. 허나 같이 탄 사람들이 그럴듯한 숙소에서, 이를 테면 썽태우 기사가 이름만 들어도 okay let's go! 하는 곳에서 내릴 때마다 물어 뜯지도 않은 손톱이 짧아지는 듯 했다.


함께 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리고, 쭉 뻗어진 해변가 도로가 나왔다. 오른편에는 해변이 펼쳐져 있었고 바다는 태양에 비춰져 반짝반짝 빛났다. 반대편에는 길거리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커다란 리어카에는 과일들이 쌓아져 있었다. 무료한 사람들이 여전히 도보 같지 않은 도보를 걷고 있었지만 적어도 약간의 웃음기가 보였다. 썽태우가 곧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상점가 같은 곳에 멈춰섰다. 우리는 내려 영어를 못 하는 기사의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기사는 나름대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설명해주었다. 안까지는 차가 들어갈 수 없다며. 할 일을 마친 썽태우는 또 다른 손님을 찾으러 출발했다. 낡은 천자락을 나부끼며.



상점가 앞에는 커다란 돌비석 같은 기둥이 두 개 있었다. 옛날에는 이름이 적힌 천막이라도 달아놨을 법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덩그러니 기둥 두 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오래된 화덕 피자집, 작은 편의점, 그리고 한 두개 정도의 노점. 그 외에는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무작정 밖에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황량했다. 걸어온 길 뒤에 바로 바닷가가 있는 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순간이동이라도 하고 싶었다. 울적한 마음이 발걸음을 늦췄다.


"빨리 와."


동생은 더위에 잔뜩 짜증이 나있었다. 다시 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숙소 같은 곳은 커녕 일반 주택가와 술집만 가득했다. 숙소가 정말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선명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자."


동생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길바닥에 앉아 무료하게 우리를 지켜보던 가족에게 말을 걸었다. 구글에 찍힌 핀을 보여주며 아주머니에게 여기를 아냐고 묻자,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듯 아주머니가 손사레를 쳤다. 가족 중에 가장 첫째인듯한 여자 아이가 아주머니의 성화에 떠밀려 앞으로 나섰다. 탈탈 붉은 반바지를 털며, 아이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우리 둘을 올려다 보았다. 내가 지도를 보여주자 별 거 아니라는 듯 아이의 두번째 손가락이 골목 안을 가리켰다. 좀 더 걸어가야 하는 듯 했다. 얼마나 걸어야 하냐는 내 말에 갸웃하던 여자 아이는 동생이 타임! 타임! 이라고 하자 박수 한 번을 짝 치고 손가락 다섯개를 펼쳤다.


"not far."


태국말로 감사하다고 했지만, 흥미를 잃은 듯 그들은 대답도 없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거기에 있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인 것처럼.


동생과 나는 뙤약볕을 또 걸었다. 둘 다 몸집만한 가방을 들고 있었다. 숙소 이름은 분명 파랑색 간판으로 되어 있어야 했다. 5분쯤 더 걸어 들어오자 거의 골목이 끝나가고 있었다.


"여깄네."


동생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 정말로 어플에서만 보던 그 간판이 있었다. 나는 울컥해서 눈물이 날뻔했고 동생은 그런 나를 보며 짜증을 냈다.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이었다.)


숙소는 놀랍게도 쾌적하고, 넓은 방에 깨끗한 침대가 있었다. 창문 아래에는 시원한 pool 이 파랗게 일렁였다. 내심 걱정했던 동생도 안도가 되었는지 들어가자마자 씻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짐을 정리하고 내려온 나는 일층 풀장에 발을 담구었다. 풀장은 작았지만 깨끗했고 풀장 위에는 파란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있었다. 숙소 모양을 따라 사각형으로 하늘이 잘려져 있었다. 사방으로 감싸져 있는 모양이라 햇볕도 들지 않았다. 완벽했다.



친구에게 소식을 전하자 잘 됐네, 라는 쿨한 답장이 돌아왔다.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진심을 다 하여 즐거운 사진과 이모티콘을 보냈다. 벌레와 도마뱀은 많았지만, 그 정도쯤이야.


교훈을 얻었다. 구글맵은 찍은지 오래 됐을 수도 있다. 당연히 업데이트를 자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인터넷에 있는 내용만으로 겁을 먹고 시도 해보지 않아서는 안 된다. 현실과 넷상은 다르다. 넷에서 사춘기를 보낸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래도 한 번 해봐야 한다. 공포나 두려움은 직사각형 파랗게 잘라진 하늘로 돌아올 때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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