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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가다 Aug 10. 2024

숙연하지 않은 이름

  그 아이와 처음 만난 곳은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성은교회라는 동네의 작은 교회였다. 까만 단발머리에, 가로가 긴 눈은 두터운 눈두덩이를 업고 있는 듯 보였는데 옷차림이 단정하고 착했다. 우린 금방 친해져서 목사님 설교시간에 눈을 맞추며 킥킥거렸고, 여름 수련회에서 같이 목욕을 하며 모기에 잔뜩 물린 서로의 종아리를 봐 주었다.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니다가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집이 가까워 자주 만나며 서로의 집, 서로의 가족, 좋아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했다. 그 무렵 난 술맛을 일찍 알게 되어 아파트 뒤 인적이 드문 나의 아지트에서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마시곤 했는데 그 아이가 짝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하며 울 때 그 장소에 데려가 주었다. 그 아이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고, 술도 처음 마셔봤던 터라 금방 취해버려서 밤에 집까지 데려다주었는데 그 이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


“우리 엄마가 너 싫어해. 니가 부르면 나가지 말래. 정말 짜증 나지?”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반항심을 섞어 좀 더 자주 만났고, 자주 마셨다. 통금이 있던 친구가 늘 일찍 집에 들어가야 해서 그 이후에는 다른 친구를 불러서 놀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일은 그 아이가 홍대에 합격하고 나서였다. 까맣던 머리가 긴 주황색 웨이브 머리로, 무채색의 옷들은 나풀나풀한 프릴이 잔뜩 달린 옷으로 바뀌었다. 그 이후 그 친구를 만나면 새로운 클럽의 이야기, 다양한 연애 이야기가 주가 되었는데 이야기는 너무 재밌어서 우리는 종종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다. 재밌는 이야기의 중간중간엔 여전히 서로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것이 어떻게 한 사람을 투명감옥에 가두는지에 대해서 더 격렬하게 토론했다. 대학을 간 우리는 여태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환경이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지를 알아갔기에 보다 전투적이 되었다. 서로 불운과 고통에 대한 경쟁이라도 하듯 자신이 더 절망스러운 상황이라며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이상하게 신이 나서 나중엔 서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신나게 고통 배틀을 하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 그럼 우린 나중을 기약하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내가 임용고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그 친구는 취업을 했다. 뭔가를 기약 없이 준비하는 것만큼 우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는 기분일 때 그 아이는 먼저 연락해 내게 술을 샀다. 그럴 때면 그 친구는 마치 나를 위해 내려온 천사 같았다. 술을 따르던 천사의 화려한 손기술을 잊을 수 없다. 맥주 컵 위에 소주잔을 쌓고, 손으로 어떻게 ‘탁’ 쳐서 섞은 뒤 숟가락으로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그런 다음 컵 주둥이를 휴지로 말아 쥐고 휙 돌리더니 그 젖은 듯 젖지 않은 휴지를 무심하게 던져 벽에 붙여 버린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아주 면밀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쇼를 보는 기분이었다.


'뭐지? 방금 이 멋지고 쿨한 퍼포먼스는? 하루아침에 나올 수 없는 이 아우라는?'


  완벽하게 폭탄주를 마는 천사.

  우린 술에 취해 클럽으로 갔다. 클럽에서 2명이 같이 온 남자들과 합석해서 룸에서 술을 한창 재밌게 마시는데 갑자기 그 아이가 집에 가자는 거다.


“한창 재밌는데 왜? 너 오늘 일찍 가야 돼?”

“아니야. 쟤들이랑 얘기 좀 해보니까 이상해. 빨리 여기서 나가야 될 것 같아. 애들 완전 쓰레기 같아 보여.”

“그래? 난 괜찮은 것 같은데? 재미있고.”

“아 뭐래? 당장 따라 나와.”


  우리가 나가려 하자 남자 둘이 막아서며 왜 가냐고 욕을 했다. 순식간에 반전된 분위기에 술이 번쩍 깬 내가 두려움 섞인 표정으로 친구를 보자, 천사는 악마로 돌변해 적절한 욕을 섞어 더 크게 언성을 높이며 순식간에 내 손목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 친구가 그렇게 카리스마가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덕분에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와서 담배를 한 대 피고 헤어졌다. 


  훗날 내가 임용에 붙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그 친구와 가족 이야기, 연애를 하고 끝낸 이야기, 주위의 재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채우는 날들이 많았다. 당일날 무심하게 보자고 연락해도 볼 수 있는 사이. 그 친구와 내가 꼭 그랬다.






  이제는 고양시 추모공원 하늘문 2층 소망관 25룸 13열에 있는 그 아이는 아직도 내 꿈에 자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간다. 나올 때마다 무슨 꿈이었는지를 기록해 뒀기 때문에 어디를 갔는지, 어떤 표정으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꿈속에서 얼마나 많이 울고 웃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한동안 거의 매일매일을 그 친구를 떠올리며 잠깐씩 울었다. 혼자 아이를 보다가, 자려고 침대로 들어가면서, 그 아이가 온 꿈에서 깼을 무렵, 샤워를 하거나, 술에 취했을 때, 맛있는 걸 먹으면서도 눈물이 났다.


  지금은 그 아이의 이름을 자주 부른다. 이름의 모양과 발음이, 이름을 떠올릴 때의 느낌이 숙연해지지 않도록 자주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고 있다. 그 아이를 아는 친구들 모임에서 술을 먹다가 아무렇지 않게 그 친구와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남편과 밥을 먹다가 무심코 그 아이가 보고 싶어지면 웃으며 남편과 나와 그 아이가 셋이 모여 놀던 날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볕이 좋은 날 혼잣말로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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