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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가다 Sep 14. 2024

40대 여자의 첫 킥복싱 수업

  얼굴만 한 커다란 복싱 글러브를 끼고 거울 앞에 섰다. 킥복싱을 배우러 오기까지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내 나이에 배우는 사람이 있을까?’부터 어린 사람에게 괜히 내 원맨쇼를 보여주는 것을 아닐지, 이 운동을 꾸준히 할 수는 있을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떨어진 체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어떤 운동이든 해야 했다. 필라테스는 재미가 없고, 헬스는 의지가 없고, 혼자는 자신이 없어서 남편과 함께 도장을 찾은 것이다.     

  처음 만난 관장님의 모습은 포스 그 자체였다. 아. 저렇게 생기면 어디에서든 싸움에 걸릴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저 기세는 역시 실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걸까. 순간 강한 인상이 부러웠다. 어릴 때부터 작은 체구 때문인지, 여자이기 때문인지 시비가 자주 걸렸다. 늦은 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다가 모르는 아저씨가 내 엉덩이를 차고 간 적도 있고, 중학교 때 시장에서 여러 명의 학생에게 돈을 뺏기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하교를 하다가 남자애들 서너 명이 장난을 걸어오는 일도 있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중, 고등학생들이 내게 담배를 사다 달라는 일이 허다했다.(물론 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나는 그때마다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두려움 때문에 쉽게 대응하지 못했었다. ‘강해져서 내게 시비 거는 그들과 시원하게 한판 실컷 싸워 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은 꿈속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격투기를 배우고 싶었는데 이제 길에서 싸울 일도 없는 나이가 되어 이렇게 체육관에 나오게 되다니.     

  

  체육관은 내게 낯설었다. 어릴 때 태권도를 배우는 친오빠를 따라서, 엄마가 되어서는 아이를 태권도에 보내려고 체육관을 방문한 것이 다였다. 운동을 직접 배워보지 않은 나는 불친절한 폭신함이 느껴지는 매트 위에서 샌드백을 치는 청년들을 뒤로하고 거울 앞에 섰다. 삭막하게 생긴, 하지만 웃을 때는 왠지 귀여운 관장님 앞에서 우리는 마치 꼬마가 큰 옷을 입은 듯, 커다란 글러브를 끼고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초 운동을 끝낸 뒤 드디어 첫 수업.     


“무조건 자세가 중요해요. 운전하다가 시비가 걸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턱을 좀 당기고, 다리는 어깨너비보다 조금 더 벌리고 오른쪽 발을 한발 뒤로 빼고 뒤꿈치를 살짝 드세요. 두 손은 항상 눈썹 끝에 붙인다고 생각하세요. 머리랑 얼굴을 보호해야 하니까요. 팔꿈치를 모으세요!”


  첫 수업에 관장님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사실은 나도 꽤 진지했다. 체력 때문에 운동하고 싶다고 관장님께 말했지만 아직도 나는 싸움을 잘하고 싶나 보다. 써먹을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첫 자세를 배우고 그 자세 그대로 스텝을 뛰기 시작했다. 3분밖에 안 뛰었는데도 종아리가 아프고 폐가 터질 것 같다. 남편과 나란히 서서 링 안에 선수가 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며 제자리에서 콩콩 스텝을 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갑자기 뭔가 우스워 보여 현타가 왔다. 옛날 드래곤볼 만화책에서 보던 ‘천하제일무도회’에 나갈 준비라도 하는 듯한 모습에 피식.      

  

  그다음은 일명 원투. 허리를 꺾으면서 왼손을 가볍게 툭, 그 뒤에 반대로 허리를 꺾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어주란다. 관장님은 엄청 쉽게 하는 그 기본 동작이 우리에게는 엄청난 심화 과정처럼 느껴진다. 관장님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시는 듯했다. 머리로는 정확히 이해했는데 몸이 따로 논다. 앞만 보고 연습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거울 속에 비친 남편을 바라봤다. 그러자 관장님이 괴롭게 웃음을 참던 모습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은 정말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은 자세로 표정만 진지하게 유지한 채 펀치를 날리고 있었으니까. 아 이 사람이 나보다 심각하구나. 시비가 걸렸을 때 저런 자세면 상대는 안심하고 내 남편을 때려눕힐 것이다. 그렇게 관장님은 우리를 신경 쓰면서 다른 청년들의 자세를 봐주고, 우리가 어느 정도 따라오는지, 체크하고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40대가 넘어서 진지하게 운동을 배우고 있는 엄마 아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9살 아들은 체육관 구석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 신기하기도 하겠지. 그러다 나와 같은 마음인 건지 종종 일어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우리와 함께 원투를 날렸다.     

  

  분명히 50분 수업인데 3시간쯤 흐른 느낌에 자꾸 시계 쪽으로 시선이 갔다. 첫날, 우리는 그렇게 원투와 스텝을 배우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했다. 관장님은 일주일에 겨우 2번 배우기에, 연습이 부족하다며 주말에는 나와 자유 연습을 하라고 하셨다. 나중에 보면 연습을 했는지 안 했는지 바로 알아볼 수 있다는 협박성 멘트와 함께. 우리는 조금 긴장해서 사부를 모시듯 알겠다고 크게 대답했다.     

  


  

  이상한 일이다. 겨우 하루만 나갔는데도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기분이다. 역시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제 남편과 나는 게으름과 싸워야할 것이다. 서로의 등짝을 때리면서 서로를 밀고 끌어 체육관에 갈 것이다. 그렇게 꾸준히 나가다 보면 언젠가 이 기술을 써먹을 일이 있을까? 괜히 누군가와 신나게 싸워 이기는 설레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런 상상 뒤에 갑작스럽게 광고의 유치한 한 문장이 떠오른다.     


“덤벼라! 세상아!”     


40대 아줌마의 킥복싱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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