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에 뭐 먹을까 고민하다가,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어 회사 근처에 위치한 어느 공기업의 구내식당을 이용했다. 이곳을 이용할 때면 주변에 저렴하면서도 건강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아 나 참 좋은 회사에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공기업 직원이 들으면 웃겠지만,, 외부인이 이용 가능한 구내식당을 운영하는 공기업 근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내가 다니는 회사가 마음에 든다.
그런데 오후에, 말로만 들었던 회사 이전이 오늘 일자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서장 부재로 대신 참석한 회의 자리에서다. 이전 계획에 있던 건물과 그 동네 사정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미리 알아 좋을 게 없는 리스크들에 걱정이 몰려와 잠시동안 이직(?)을 고민했다.
가장 큰 문제는, 건물에 딸린 주차장이 없고, 길거리 주차도 어려운 데다 주변 공영주차장은 정기주차권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초등 저학년 아이의 등하교와 중간에 생길 수 있는 다양한 변수들 때문에 자차를 몰고다니는 게 좋긴 한데, 주차를 할 마땅한 곳이 없으니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한다. 어렵게 주차공간을 찾는다고 해도 아마 주차한 곳에서 회사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많이 걸릴 터였고, 늘 지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느니 버스를 타는 게 나을 것이다. 이사를 하기까지는 어림잡아 3개월은 더 있어야 하는데, 버스 노선부터 검색했다. 버스가 많지는 않지만 출퇴근 시간을 최대한 단축할 수 있는 노선을 찾고 나니, 당분간 이직에 대한 생각은 접어도 되겠다 싶었다. 10년 가까이 차를 몰면서 대중교통 이용이 어색해진 터라 대중교통에 적응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그리고 나서 새로운 회사 건물 주변의 밥집을 검색해 보았다. 바로 옆에 별점 2점대의 맛없는 스테이크집이 하나 있었고, 단품 메뉴 하나만 파는 곰탕집이 있었다. 유명한 한정식 식당이 있긴 한데 워낙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서 늘 웨이팅이 길다고 들었다. 이러다 근처 재래시장에서 주구장창 떡볶이와 국수만 먹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차도 없으니 이동도 어렵고, 지금처럼 구내식당을 이용할 수 있는 기업도 없다. 심지어는 4천원 이하에 라떼를 파는 커피숍도 없다. 다시 도시락을 싸고 다녀야 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아침에 일어나 내 몸뚱아리 하나 챙기는 것도 힘든데, 아이 챙기고, 도시락 싸고, 도시락 가방 들고, 아이 등교시키고, 버스타고, 한 차례 환승하고. 비오는 날에는 아이 챙기고, 도시락 싸고, 우산들고, 도시락 가방 들고, 아이 등교시키고, 버스타고, 환승하고. 눈오는 날은 아이 챙기고, 도시락 싸고, 감기 안 걸리게 꽁꽁 싸매고, 도시락 가방 들고, 아이 등교시키고, 버스타고, 환승하고.. 아침의 풍경이 그려져 구내식당이 있거나 근처에 있는 기업체 구인공고란을 검색해봐야겠다는 불온한 생각을 또 잠시간 했다.
오늘 청주지역의 모 문화재단지 공무원들이 먹을 식사를 청소 등 시설물 환경정비로 고용된 70대 기간제 여성 노동자가 수년간 준비해왔다는 기사를 접했다. 해당 직원이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출근 시간 전에 시장에 가서 식재료를 구입하고 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문화재단지 공무원은 주변에 식당이 별로 없고, 매번 배달음식을 시키거나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이 힘들어서 기간제 근로자와 "합의 하에" 식사 준비를 맡겼다고 한다. 또한 직원이 "거부의사를 밝힌 적이 없었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에 대해 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청주시청 홈페이지에는 이러한 기사를 접한 시민들의 항의글이 쏟아졌다고 한다. 주로 70대 노인에게 밥을 시켰다는 것, 업무 외 노동을 부당지시한 것은 명백한 갑질이라는 지적과 출근 전 장을 봐온 것에 대해 초과수당은 지급했냐, 그 밥 얻어먹고 건강하냐는 등의 비아냥 글이었다. 거부의사를 밝히든 밝히지 않든 만년 계약직 청소노동자에게 점심밥 차리는 일을 시키는 것은 누가 봐도 비상식적이다. 정규직이거나 공무직이었다면 이 일을 지시도 수락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남성노동자였거나 젊은 여성이었다면 아예 지시나 부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머리 속이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우리에게 밥을 하는 나이든 여성의 모습은 너무나 익숙하다. 가까이에는 엄마가 있고, 멀리에는 할머니가 있다. 심지어 학교 급식실에도 나이드신 여성들이 대다수다. 어떤 이들은 평생 누군가가 먹을 밥을 대신 해주는 의무에서 면제되어 살지만, 대다수의 여성노인들은 어릴적부터 엄마를 도와 동생들을 먹이고, 결혼 후 남편과 자식을 먹이고, 자식들이 출가를 한 이후에도 은퇴한 남편과 이따금씩 찾아오는 손주들을 먹이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 공무원들은 70대 여성 근로자가 아침 저녁으로 장을 보고, 장바구니를 들고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 식재료를 씻고, 썰고, 다지고, 볶고, 삶고, 지지고, 끓이는 모습, 탕비실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 그릇에 먹거리들을 담아 상에 내어오는 모습들이 매우 익숙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랑, 정성, 손맛 등으로 지칭하는 그런 모습말이다. 공무원들은 고생하셨다고, 밥이 참 맛있다고 음식솜씨가 좋으시다고 웃으면서 칭찬을 건넸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머니같은 분이 직접 점심을 해주시니 회사 다니기 참 좋다고, 계약직 근로자와도 따뜻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여자라면, 더군다나 남편과 자식을 위해 평생 밥을 해온, 또는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밥을 하는 일이 그리 힘든 일도 아닌데, 뭘 이걸 갑질이라고 하냐고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식사 준비 시간이 1시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이들의 인식을 보니, 평생 밥을 얻어먹기만 했지 매일매일 누군가에게 밥을 해서 먹인 적은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밥하는 일은, 무얼 만들 것인가 고민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이 된다. 그 고령의 근로자는 식사 준비를 끝내고, 내일은 또 무슨 반찬에 무슨 국을 준비해야 할까 고민했을 테고, 정해진 예산 안에서 어떤 식재료로 낭비하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낼 수 있을까, 무얼 만들어야 잘 차려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고심했을 것이다. 결코 식사 준비는 1시간 안에 끝낼 수 없다. 남은 식재료를 파악하고 무엇을 해 먹을지 고민하는 시간 더하기 시장을 봐 온 시간 더하기 식재료를 다듬고 손질하는 시간 더하기 조리하는 시간 더하기 뒤처리하는 시간까지 나를 먹이고 타인을 먹이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내가 먹는 밥이 그토록 중요한데, 그 밥을 차리는 일을 이리도 사소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최근 그 고령의 근로자가 몸이 불편하여 식사 준비에 어려움을 호소해도 공무원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았단다. 자그마치 10년이면,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에 익숙해지고도 남을 긴 시간이다. 사람들의 분노는, 기간제 계약직이라는 약자의 편에서 공무원들의 갑질을 향한 것이겠지만, 나는 조금 다른 면을 함께 볼 수밖에 없었다. 갑질이 아니라고 거부하지 않았다고 항변만 하지 말고, 성인이 됐으면, 밥은 집에서나 나가서나 알아서들 해결해라. 그 나이면 자기 밥은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나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