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은 홍시가 된다 Apr 15. 2024

67년생 엄마가 혼자서 도쿄에 왔다. - 1

우리가 굳이 사랑을 말하지 않는 이유


혼자 힘으로 비행기를 일은 평생 없었다고 했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당신의 나이 20대 중반에야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과 육아 생활이 펼쳐졌으니 그럴 도 하다. 그렇게 50대에 접어들고, 자녀들이 자기 할 일은 어느 정도 알아서 할 법한 나이가 되고, 엄마도 일을 다니기 시작하며 조금씩 돈을 저축했다. 그러고는 젊은 날 보지 못했던 넓은 세계를 몇 번인가 보러 다녀왔다. 그마저 대부분은 곗돈으로 가는 패키지여행이었으니 혼자 비행기를 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었다.

막내딸이 타국에서 잘 살고 있는가 걱정이 되었는지, 과감히 비행기 티켓을 사셨다.


함께 휴가를 맞춰 쓸 수 있는 날은 단 3일.


도쿄에 오기 전 몇 번이나 엄마와 영상통화를 하며 비행기 티켓은 어디서 사야 하는지, 해외에서 연락은 어떻게 하는지, 입국 수속은 어떻게 되는지를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엄마도 몇 번이고 내게 '비행기 내려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어떻게 해?' 라며 초조한 듯 물어봤다. 나는 엄마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그냥 같이 탄 한국 사람들 따라가면 돼!'라고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오모테산도 주변 산책


비행기는 여러 번 타 봤지만, 나 역시 누군가를 마중 나가기 위해 도심에서 공항까지, 도착 터미널까지 찾아 간 적은 생전 처음이었다. 출국 터미널이 아닌 도착 터미널에 가만히 앉아 구경하는 일은 새삼 신선했다. 종종걸음으로 단체 여행 멤버들을 찾아다니는 여행사 가이드, 나처럼 의자에 앉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외국인들, 정장을 빼입고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를 피켓을 든 채 가만히 게이트 앞을 지키는 사람들.



이야기는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도 나도 도쿄 방문이 처음이었을 때, 내게 모든 계획을 맡기고 자유여행을 4일 떠난 적있다. 나는 철없게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욕심부려 관광지며 젊은 아이들이야 좋아하는 맛집이며 꾸역꾸역 계획에 집어넣었고, 아무 불평 없이 따라와 주던 엄마는 3일째 밤부터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었다. 간신히 한국에 발을 딛자마자 응급실에 실려갔다(...). 너무 무리했던 것이다. 수술도 하고 한동안 크게 병원 신세를 졌었다. 엄마도 충격이었겠지만, 나 역시 그 기억은 여전히 큰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그 후, 부모님과의 시간은 무조건 부모님께 맞추기로 굳게 결심했다. 이번에야말로 6년 전 철없던 나의 어린 행동을 만회할 타이밍이었다.


도쿄 시모키타자와에 있던 어느 꽃집.


딸내미가 일본에 일하러 간 지 벌써 반년이 흘렀다. 고향을 떠나 진학한 대학. 재작년에는 생뚱맞게 북유럽 국가로 유학하러 가 버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갑자기 자가용으4시간 걸리는 지역의 공기업에서 인턴을 한답시고 떠나질 않나, 졸업을 앞두니 이번에는 일본에 정규직으로 취직했단다. 우리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정신없음]의 표본이 바로 내 선택들이다("어휴, 넌 너무 왔다 갔다 해. 아주 정신없어 죽겠어!"). 참고로 내가 고향에서 공무원 공부하길 오래도록 바라고 있는 엄마다.


아빠는 한 달, 엄마는 두 달을 예상했다. 하나를 진득 하지 못하는 내가 일본에 가서 그 기간도 못 버티고 귀국할 거라는 작은 내기였다.


롯폰기의 회사 밀집 스트리트


내기 대로, 수백 번도 더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지만 어느새 일본에 온 지 반년이 지났다. 사실 반년 동안 나는 정말로 좀비와 다름없을 심신으로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물리적으로 나의 몸은 아직 일본에 있지만, 엄마, 아빠의 예상이 차라리 맞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난 3월스스로 '지옥'이라 부를 만큼 힘든 일들이 많았으니까.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가족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과 연락도 거의 안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빴다.


나고야의 어느 버스 정류장


심지어 엄마가 도착하기 전날에는 이직 면접을 아침 일찍 보고, 밤 10시 넘어서까지 일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심신은 매일 지쳐 있었고, 때문에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도 도무지 긍정적일 수 없었다. 끝없이 어두운 하강 곡선이 이어질 뿐이었다. 엄마와의 만남이 나의 유일한 삶의 이유일 지경이었다.


그러니 엄마가 걱정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날, 그간 돌보지 못해 엉망이 된 나의 방을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정돈하고, 귀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작가의 이전글 타국에서 겪는 사회초년생의 우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