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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벌이랑 Oct 24. 2024

아내의 연인(戀人)

'처용가(處容歌)' 감상문

아내의 연인(戀人)     


  아내가 나와 결혼한 지 벌써 15년째. 가끔 내 아내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연인은 어떤 사람일까 가끔 상상해 볼 때가 있다. 특히 햇빛이 화사하게 부서져 내리면서 갖가지 꽃이 피어나고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오월, 소위 ‘가정의 달’에 아내의 심중이 봄처녀처럼 들떠있다 싶으면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 여자에게 나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남자가 있을까. 

  이 여자가 나보다 더 사랑할 수 있고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남자는 과연 어떤 유형의 남자일까. 

  내가 이 여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천생연분의 배필일까. 


  혹시 내 아내는 꿈속에서 어떤 이상형의 남자를 연인으로 설정하곤 밤새 사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가 그리는 이상형의 연인이 어떤 남자임을 고백받을 수 있다면 내가 그런 남자로 변신할 수 있을까.


  결혼 이후 마음 밑바닥에 자리 잡은 확신 중의 하나는 아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 이외의 다른 남자를 연인으로 구체화시키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한 여자를 배필로 맞이한 부군(夫君)이 가져야 할 기본 신뢰의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요즘 세태가 그렇고 그렇다 보니 아내를 굳게 믿고 살아가고 있다는 마음이 더욱 소중할 때가 많다.


  한편으로는 아내로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신뢰에 버금가는 믿음을 되돌려주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내 마음속엔 아내 이외의 다른 연인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는 핑계로 항상 아내에게나 친구들에게 결백과 지조를 주장하고는 있지만, 마음과 시간에 여백이 주어지더라도 곁눈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인지 나 자신 헷갈리기도 한다. 다만 부하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그 부하를 사지(死地)에 보냈던 다윗 왕이 무릎 꿇고 피눈물로 회개했던 모습을 그려보면서 항상 아내에 대한 신의를 최후의 보루로 지키자고 마음을 다잡을 뿐이다.     

  ‘처용가’를 이십 년이 훨씬 지나 다시 대하며 내가 처용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아직도 흥겨운 발걸음이 닿는 돌담길에도 여전히 달빛이 환하다. 가을바람이 제법 서늘하지만 대추나무 너머 저 보름달에서 쏟아지는 월광(月光)에 신라 땅에서의 가을 정취가 감돈다. 팔월대보름에 뭇 건장한 남정네들과 여염집 아낙네들이 밤늦도록 휘영청 밝은 달빛에 어울려 노는 것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다가 이제 귀가하는 길이다. 멀리 아랍 땅에서 찾아온 이 이방인의 시선은 그들의 군무(群舞)에 사로잡혀 온 장안을 끌려 다녔고, 그래선 지 심신이 뻑적지근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흥겨운 가락은 여전히 귓가를 맴돈다. 

   

  내 고생고생해서 수십 만리 먼 뱃길로 개운포에 당도하니 이곳 사람들의 호기심이 대단하였다. 내 큰 키와 오뚝한 콧날이 이곳 사람들에게 신비로운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타고 온 상선이 마치 용의 전령(傳令)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꼈던지 이곳에 남게 된 나를 두고 일부는 용신(龍神)의 일곱째 아들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동료들이 남겨주고 간 중동의 약품과 의술은 이곳에 가끔 발생했던 속수무책의 역병(疫病)에 몇 차례 시용(施用)해본 결과, 효험이 대단하여 이곳 사람들에게 소문이 자자하던 차였다. 거기에다가 아랍인 특유의 무표정과 우수(憂愁)가 이들에겐 감히 범접 못할 분위기로 느껴진 탓인지, 나에게 아름다운 신라 색시와 편안한 집과 그럴싸한 벼슬로 이 나라에 남고자 했던 나에게 기대 이상의 후한 대접을 해주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이제 집 안마당에 들어서니 마당조차 대낮처럼 환하다. 그러나 방에 오르는 댓돌 위에 아내 신발 옆에 웬 남정네의 커다란 신발이 놓여있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방문을 들여다보는 순간....


......(중간 생략).....     


  어허! 하늘이 무너지는구나. 이럴 수가. 비록 내가 먼 외지에서 온 남자인 탓에 아내에게 향하는 애정표현이 다소 어수룩하더라도, 그리고 내가 선남선녀의 춤을 감상하다가 늦은 시간까지 집을 비웠다 하더라도, 내 침소에서 버젓이 애정행각을 벌이는 건 도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어허! 절로 비탄의 눈물이 나는구나. 아! 믿었던 아내가... 그것도 흉악한 역신이란 놈과... 네놈이 내 것으로 정들었던 아내의 하얀 두 다리를 빼앗다니... 어 흐흐흐! 어 흐흐흐...

아! 나는 이제 어쩌란 말인가. 빼앗긴 것을 어쩌란 말인가. 어 흐흐흐! 역신을 쥐어박은들 무슨 소용이고, 사랑하는 아내 이제 와서 구박한들 무슨 도움이 되리오.


  마당에서 휘영청 달빛아래 마냥 이렇게 울 수밖에. 덩실덩실 내 억장이 무너질 듯한 마음을 춤으로나 달래 보면서... 어흐흐흑! 어흐흐흑! 


  *어찌나 서럽게 울며 춤을 추었던지 역신이란 놈이 뛰어나와 무릎 꿇고 다신 안 그럴 것을 맹세하면서 용서를 구하고는 이내 물러간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처용이 아니어서. 처용처럼 달밤에 서럽게 울 일이 없어서. 아내를 빼앗기곤 가슴을 쥐어짜는 비탄의 눈물을 흘릴 일이 없어서.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항상 아내의 유일한 연인으로 옆에 남아있는 수밖에.


  며칠 후 아카시아꽃 향이 창가로 흘러드는 달밤에 아내에게 귓속말로 전해야겠다. 나는 살아있는 동안 그대의 하나밖에 없는 연인이고 싶다고.     


[00/05/16]

* 커버 이미지 : 연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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