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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벌이랑 Dec 10. 2024

빛고을 짧은 여로

컴퓨터 서랍 속에서 꺼낸 24년 전

 빛고을 짧은 여로


  광주역 앞에서 택시를 내리자 부슬부슬 내리던 봄비가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제법 세차게 퍼붓기 시작한다.

   "선생님께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

  보통 택시에서 내릴 때 '수고하셨습니다' 또는 '감사합니다' 정도의 인사로 그치게 마련이지만, 방금 탔던 개인택시의 운전기사에게는 선생님이란 호칭에다가,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덧붙였다. 비교적 장황한 인사치레였지만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잔돈을 거슬러 받고 오십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역사 건물까지 책이 든 손가방을 품에 안고 뛴다. 토요일오전인 탓인지 아직 광주역 구내는 한산하다. 오전 11시 13분 순천발 서울행 무궁화 열차가 도착하려면 이십 분이나 남았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광주역 광장으로 쏟아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천천히 마신다.      

  

  아침에 화순 온천 휴양지에서 내가 속한 동물학 관련 학회들의 공동 연구발표회가 있었다. 늘 그렇듯 발표회장을 떠나오는 발걸음이 씁쓸하였다. 학술연구발표회라고 거창하게 이름해봐야, 대부분이 고작 일 년 안쪽의 단기간에 급조한 조사결과 또는 실험내용뿐이었다. 속 좁은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런 것들이 과연 이 나라 학문발전에 무슨 보탬이 되겠냐 싶었고, 응용성을 따져 보더라도 생명산업 현장에는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오십여 편 발표논문 중에서 심혈을 기울여 수년 동안 알차게 다듬은 성싶은 연구결과는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괜찮다 싶은 결과들은 예외 없이 외국에서 수행된 것들이었고, 그것도 순전히 외국학자의 아이디어와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나이 든 계층들은 골머리 아픈 연구발표를 듣기보다는 휴게실에서 잡담과 인사나누기에 여념이  없다. 정작 연구책임자의 위치에 있는 그들이 휴게실로 빠져나가 김 빠진 발표회의장에선 그들이 던져준 타성에 고이 길들여진 젊은 대학원생들이 환등기로 슬라이드를 비추며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맥이 없고 지루했다. 연구에 대해 책임질 사람도 없고 조언해 줄 사람도 없었다.       


  환등기를 비추느라 어두워진 좌석에 앉아있으려니 어제 밤늦게까지 오랜만에 만난 후배들과 나눴던 술잔들이 숙취로 몰려오며 갑자기 속이 거북해져 서둘러  발표장소를 나왔다. 어차피 서울에서 오랜 친구가 오후에 한번 만났으면 한다는 전화를 이른 새벽에 받은 바도  있어, 핑계 김에 일찍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발표장을 미련 없이 떠났다. 휴양지에서 광주시내까지 운행하는 순환 버스를 타려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겠기에, 전남지역에서 일하는 후배의 도움으로 광주 시내버스가 다니는 고서삼거리까지 승용차로 달렸다.       

   

  오랜 가뭄 끝에, 아침부터 시작된 비로 한껏 젖어있는 무등산 굽이길을 달렸다. 차창 밖으로 다가오는 길가 수목의 잎들이 눈에 아릴 정도로 밝은 녹색 빛을 뿜으며, 어스름 물안개 사이로 번져가고 있었다. 음침한 곳에서 지루한 실험결과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거기서 놓여난 해방감 때문인지 간간이 후배가 가리키는 '화순적벽'이며 '소쇄원', '환벽당'을 멀찌감치 감상하는 맛이 제법 상쾌하였다.

  화순에서 광주시로 접어드는 고서 삼거리에서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기사에게 광주역까지 택시로 쉽게 갈 수 있는 곳에서 내려달라 정중히 부탁을 하고, 그가 쉽게 나를 부를 수 있도록 승차하는 문 앞의 좌석에 앉아 넓은 버스 유리창으로 다가왔다 사라지는 시골길을 눈에 담으며 광주시내로 향했다.

       

  광주시내로 들어오는 중간 정류장에서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허겁지겁 뛰어와서 떠나려는 버스를 간신히 잡아타더니 기사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워매 힘든 거! 거기 기사 양반, 뭐 땀시 정류소를 이리 옮겨 가지고, 마을 사람들 고생시켜 쌋소 잉.'

  버스기사가 외지 사람인 나를 의식해서인지 내 쪽을 한번 힐끔 쳐다보았다.

  "아따 그건 이쪽 마을 사람들이 여기가 주민 수도 많고 한갓지니, 이리로 옮겨달라 시에 건의해서 그런 것 아니었겄소. 그땐 웃마을 아랫마을 모두들 찬성혔다 하면서 옮겨 달랄 땐 언제고, 시방에 와서 멀다고 불평하면 어찌하것소?"

  버스 기사는 별로 화나진 않은  말투지만 몇 안 되는 승객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이곳으로 정류장을 옮긴 사연을 꿰고 있는 기사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뜻인지 아주머니는 체면치레로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이내 입을 다문다.


  버스 기사는 내 쪽을 다시 쳐다보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머니와의 대화내용과는 적당치 않은 비유로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시방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가는 몰라도, 내가 다른 여자와 사랑을 허면 아름다운 로맨스요, 나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연애를 허면 몹쓸 불륜이라는 셈인가 보요."

  우격다짐으로 해석하자면 방금 버스에 오른 아줌마에게 요즘 멀어진 정류장은 영 마땅치 않은 불륜이고 이쪽 주민들이 오히려  불편해했던 먼저 정류장은 자신에게는 소중했던 로맨스로 빗대보는 수밖에.


  허름한 옷차림의 비쩍 마른 청년이 요즘 보기 드문 비닐우산을 접으며 버스에 오르더니 뒷머리를 긁는다.

  "죄송하게 되었고 마니라. 백 원이 모잘라 불었소."

  그러면서 백 원짜리 동전 네 개를 차비 수거함에 넣고는, 배짱 좋게 뒤쪽으로 들어간다. 기사는 백미러로 청년이 뒷좌석에 앉는 모습을 보면서 예의 큰소리로 농을 건넨다.

  "워따 잘 생긴 총각아! 백 원이 모자라면 거기에 상당허는 양말 한쪽이라도 벗어 넣어야 하제. 요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은근슬쩍 넣어도 될 성싶지만 그래도 솔직히 돈이 모자람을 자백하고 당당히 자리에 앉는 청년이 밉지 않은 눈치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달려 광주시내에 접어들었다. 이십 년 전의 오월이 교차되는 광주 거리를 보면서 조금씩 울적해졌다. 늘 빛고을 광주를 지날 때마다 느꼈던 허망함과 울적함이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은 비가 오는 어둑한 날씨에 특히 연구발표회에서 식상한 마음까지 가미되어 더욱 음산한 기분이었다. 그나마 광주시내에 들어오는 버스의 기사가 승객들에게 건네는 붙임성 있는 농담으로 어두웠던 마음이 조금 풀리긴 했지만 말이다.

      

  정류장에서 계속 정차하는 버스들을 비켜나 은행나무 가로수  밑에서 비를 피하며 택시를 기다렸지만 한동안 다가오는 빈 택시가 없었다. 오 분쯤 지나서 보행자 신호에 대기 중이던 택시 한 대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나를 보고는 이내 달려와 앞에 섰다. 앞자리에 앉아 목적지인 광주역을 말하며 운전석을 힐끔 본 순간 운전석의 희한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운전석 핸들 부근과 천장까지 심지어는 조수석으로 이어지는 앞부분의 빈 공간에도 도배한 듯 덕지덕지 종이쪽지가 스카치테이프에 붙어있고 손바닥만 한 쪽지들에는 검은 볼펜으로 촘촘히 쓴 한자(漢字)들이 도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운전 중 한자를 암기하기 위해 붙여놓은 것으로 보였다. 조수석 앞에 개인택시 운송조합에서 만든 명패를 보니, 빛바랜 증명사진 밑에 '조범연'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광주역까지 십여 분간 택시로 오는 동안, 회색 빛 하늘 아래 광주 거리에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의 음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나는 그에게 쉴 새 없이 말을 붙였다.      

  광주에서 이십 년 이상 택시운전을 하는 그는 올해 54세로 나보다 십이 년이나 앞선 나이였다. 그가 한자 공부를 시작한 건 삼 년 전부터였다. 처음 이년 동안 천자문을 떼고 일 년 전부터 지금까지 제법 두툼한 옥편의 절반을 암기하고 있다.


  그가 처음 한자공부를 시작할 무렵에는 눈물겨울 정도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고작해야 열 자 내외밖에 외울 수가 없었고, 그나마 이튿날이면 고스란히 잊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문교부에서 지정한 실용 천자문을 외우는데 이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차츰차츰 기억력이 되살아나고 한자의 부와 획에 익숙해지면서, 요즘에는 하루에 거의 백 자 이상을 암기할 수가 있다고 한다.      

  "뒤늦게 이렇듯 한자공부를 하면서 생에 의욕을 되찾았지요. 이상하게 건강도 좋아집디다. 하루종일 운전하고 다녀도 별로 피곤한 줄 몰라요."


  신호대기 중에 천장에 붙은 쪽지에 있는 한자를 보고 핸들 중앙에 손가락으로 써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옛날에는 손님 기다리느라 정차하고 있으면 친구 기사들과 잡담만 했지만, 요즘은 차를 세우면 기회다 싶어 공책에 외운 글자를 부지런히 써본답니다. 처음엔 친구들이 다 늙어 가는 마당에 쓸데없는 한자 공부가 다 뭐냐고 놀리더니 요즘은 은근히 부러워들 하고 있지요."

  "내년까지 옥편 다 떼면 한두 해 한시(漢詩)를 읽고 그다음부터는 영어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영어도 지금 공부하는 방식대로 한 오 년 부지런히 하면, 그때쯤 손자 애들이 중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는 따라갈 수 있겠지요."

      

  삼 년 전 대학에 다니는 딸이 물어본 증(曾) 자를 회(會) 자로 잘못 가르쳐준 것이 못내 창피해서 그다음 날부터 천자문을 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오십이 넘어 좀  늦다 싶게 이런 계기가 찾아왔지만, 그의 생이 치열한 삶으로 전환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가 매일 택시를 운전하는 와중에도 한자공부에 몰두하여 진지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동료 기사들이나 가족들에 큰 귀감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아니 나처럼 다른 지방에서 광주 시내를 다녀가는 사람들에게 빛고을 광주 시민의 부지런하고 치밀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리라.


  광주에서 현대역사의 허망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간혹 조범연 씨를 만나게 되면 광주가 그 이후에도 이렇게 매일의 삶에서 치열한 자기 탐험을 계속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안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운전 중의 자투리 시간이라도 활용할 새라, 한자를 적은 쪽지를 운전석 주변에 도배하듯 붙여서 외우고 있는 조범연 씨와 그의 건투에 존경심을 보내며, 그래서 전혀 어색하지 않게 선생님이란 호칭에다가 건강하시라는 깍듯한 인사를 하고 내렸나 보다.       


  광주역 광장에는 우산을 쓴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였고, 구내방송으로 11시 13분 순천발 서울행 무궁화 열차가 도착할 것이라는 전갈이 왔다. 벌써 길게 늘어선 행렬의 뒤를  따라 개찰구를 통과하여 플랫폼에서 잠시 기다린 다음 도착한 무궁화 열차에 올라 지정 좌석에 앉는다. 옆에는 내 또래의 남자가 옆 좌석의 인기척에도 아랑곳없이 깊은 잠에 빠져있다.

   

  한가한 객차와 서서히 흘러가는 풍경이 마음에 여유로 다가온다. 가방을 머리 위 짐받이에 올리려다 아직도 진행되고 있을 발표회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방 속에 있는 연구발표 초록집을 꺼내 다시 훑어본다. 스치는 비와 멀리 보이는 농촌풍경들의 진지함 탓인지, 제목들을 다시 바라보는 눈길이 발표장에서의 삐딱한 시각을 벗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들 나름대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어낸 연구결과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무시해 버렸던, 나의 어설픈 속단과 예견이 부끄러워졌다. 만약 내가 공들여 찾아낸 연구내용을 진땀 흘려가며 발표를 하고 있는데, 남들이 한마디로 쓸데없는 공허한 결과로 치부해 버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면 그처럼 비참한 낭패감이 어디 있을까. 나는 남들이 살면서 일궈내는 작업들을 쉽게 비난하고, 그 가치를 절하하는 데 너무 익숙해진 것 같다. 버스 기사가 빗댄 것처럼, 내가 추구하는 것은 고상한 로맨스처럼 위안하여 만족해하고, 남의 행태는 불륜으로 단죄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던가.


  광주 시내에서 일개 개인택시 운전사에 불과한 조범연 씨가, 자신의 생업과 전혀 관계가 없는 한자 공부를 나이 오십이 넘어서 시작한 것을 냉소의 눈으로 보면, 시간낭비요 무모한 짓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년이 넘어서 이뤄지고 있는 천자문과 옥편 외우기가 그의 삶을 반전시켜 진지하고 건강한 생활로 이끌었고, 그의 딸과 가족에게 믿음직한 신뢰를 선사하고 있지 않은가.

  조범연 씨와 같이 일상생활 속에서 새롭게 변화하려는 시도가, 자칫하면 역사적 허무감에 빠져들 수 있는 소시민들의 인생행로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비록 역사의 주체로서 가시적인 성취와 만족감은 얻지 못하더라도, 살아가는 삶의 구석구석에 생산적인 화두(話頭)를 달고, 매일 아주 조금씩이라도 치열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다가설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견지하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사랑을 보내야 하리라.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차창 밖을 보니 기차가 어느새 광주를 벗어나 뿌옇게 물안개에 젖은 호남 평원을 세차게 달리고 있었다.

                                                                                                                                                 [ 0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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