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CY Dec 28. 2023

정치인이 나라 망가뜨린다고? 천만에.

"제 나라는 제 손으로 무너뜨린 후에야 다른 이가 멸망시키는 것이다."

수십 년을 '일용직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일해 오셨던 아빠. 난 아빠의 일이 하찮다고 생각한 적도, 그렇다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노력에 비해 그 대가를 지급받으시는지도 잘 모르겠으나, 아빠 본인의 표현으로는 공부가 싫어서 이 일을 하게 된 거라시니 달리 할 말도 없다.


그러다가 올해 초부터 생애 최초로 직장 노동자가 되신 아빠. 그럴 계획이 있으셨던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건강보험 직장가입자가 되셨다. 월급제에, 일용직으로 일하셨을 때보다는 많은 금액의 봉급.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는 노동 환경. 그때나 지금이나 아빠는 주 6일 일을 나가시고 한여름에도 한겨울에도 밖에서 일을 하신다. 그나마 혹독한 날씨가 며칠 이어지면 공사중지명령이 내려져서 현장 근무는 일시 중단.


대한민국 인구의 90%가 일한다는 중소기업, 그중에서도 소기업에 속해 계신 아빠. 아빠와 그곳 동료분들은 그렇게 쉬고 싶을 때 쉬지도 못하고 고작 일주일에 하루, '일요일'에 쉬신다. 내가 알기로는 아예 쉬고 싶을 때 쉰다는 개념조차 없더라. 그나마 아빠의 친척 어른들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는 '사장의 넓은 아량' 덕분인지 3일째 되는 날 하루 쉬셨다.

여름 휴가철에도 (적잖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그리고 '적잖이들 그럴 것'이란 표현을 쓰는 것조차 참 씁쓸하지만) 휴가 일자는 지정되었고, 이번 겨울에도 마찬가지로 지정됐다. 대체 이 나라가 21세기에 있는 게 맞는지, 보수 정부나 진보 정부 모두 자랑하는 '선진국'이 맞는지 의문이 드는 상황인데, 현실이 그렇더라. 어느 나라나 매한가지라면 할 말은 없겠는데, 여전히 노동자가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 제 마땅한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상황. 이게 그 찬란하고 눈부신 성과를 이뤄 온 대한민국의 단면이다.


사실 아빠가 쉼을 사치로 아시는 성격인 것도 문제기는 한데, 그렇게 '매주 일요일'과 간혹 있는 상례(喪禮) 시기를 제외하면 쉬지 못하신 아빠가 며칠 전에 겨울 휴가 얘기를 꺼내시며 하신 얘기가, 사장이 정기 휴일인 일요일을 휴가 일자에 포함해서 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방에 있어서 못 들었다가 엄마가 역정을 내시길래 뭔 일인가 했더니 바로 저 이유였다.

휴가도 마음대로 못 쓰는 곳에서 휴가 일자도 사장의 지시에 따라 정해야 하는 판에, 그나마도 일주일에 한 번 쉬는 일요일을 휴가 일자에 넣으라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싶었다. 어이가 없어서 화를 내고 헛웃음을 지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빠는 무념무상. '사장이 그러라면 그러는 거지' 싶으신 듯한데, 이게 과연 쌍방 계약 관계에 의거한 합당한 행위인지, 아니면 말만 계약일 뿐 일방적 주종 관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말씀이 없으신 걸로 보아 다른 노동자들도 이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듯했는데, 중소기업 형편이 이 모양이니 이래서 그리도 대기업에 가라는 건가 싶었다. 그래 봤자 대기업에 가면 실컷 기업에 부려지다가 40대 초중반에 희망퇴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강제 퇴사)을 하는 게 이 나라 현실인데, 그런 말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잘살 수 없는 건 인간이 그런 존재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건 공산당 패거리의 패악질과 반인간적 행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에게 그렇게 살아갈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받는 삶, 높은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한 상호 부조로 보험 없이도 어려움을 감당하고 또 극복할 수 있는 삶. 그런 세상이 정말 왔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정작 인간의 욕심이 모두가 잘살고자 하는 세상을 거부해 왔다. 기독교는 지상 천국을 말한 적이 없으니 빼고, 유교로 따지면 공자의 '대동 사회'가 그런 것일지는 모르겠으나, 그토록 주나라의 정전제 타령을 하던 선비들이 조선을 말아먹지 않았던가. 신의(信義)를 외던 이들이 부부간의 신의는 저버리고 첩을 두고, 기방에 가서 기녀와 놀아나고, 제 집 여종을 데려다가 통간(通奸)하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는 것부터가 이 나라가 뿌리부터 썩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말이라도 그렇지 '사촌'이라니, 그 옛날 씨족 사회 단위였던 세상에서 같은 집 내지 이웃집에 살았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니 이게 대체...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얘기다. 그러니 박정희가 어떻고 이승만이 어떻고 하는 얘기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수밖에. 국가의 부가 나의 부로 이어지지 않는 한 국부(國富)니 부국(富國)이니 하는 건 무의미하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있었던 대만 정부통령(현지 표현으로는 총통-부총통) 선거 정견발표회에서 대만민중당 소속 우신잉(吳欣盈) 부총통 후보가 그런 말을 하더라마는. 반도체 산업 호황으로 국가 GDP는 상승했으나 정작 민중들의 삶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는 말.


아무리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전 세계 백여 개 국가를 통틀어서 상위권에 있다 해도, 그게 도대체 국민, 그리고 인민(개인) 한 사람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기층 노동자 중에 하루에 한 끼로 만 원 이상을 꼬박꼬박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도권 집값은 끝을 모르고 치솟고(일시적으로 떨어지긴 해도 결국 오르게 돼 있다), 지방 집값은 그에 비하면 3분의 1은 될까 말까 한 수준이나 그마저도 쉽게 살 수 없는 게 이 나라의 상황 아닌가? 그런데도 국뽕 타령을 하며 '자랑스런 대한민국' 운운하는 이들은, 미안하지만 생각이란 게 있나 싶다. <국기에 대한 맹세>의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란 구절이 정말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지?


헌법은 지켜지니까 제정된 게 아니라 지키라고 제정된 것이다. 개인의 신념에 따라 헌법 조문을 해석하는 방향성이 다르고, 심지어는 헌법 조문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헌법이란 그만큼 연약하기에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특히 '권리'에 대한 조항이 그렇다. 의무는 강제로 떠밀고 지우면 그만이지만 권리는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그 무엇보다 권리가 중시돼야 하며, 아무리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의무보다 권리가 우선시돼야 한다. 권리는 보장되지 않으면 얼마든 그 효력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유약한 개념이기에 반드시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 나라가 어떤 상황인지를 알려면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의 말부터 들으면 된다. 살 만한 사람들은 다 살 만하다고 하지 어렵다고 안 해서다. 이 단락을 입력하는 순간에도 수없이 쏟아질 기사에 과연 이 나라의 상황이 좋다는, 혹은 괜찮아지고 있다는 내용이 얼마나 담겨 있을까?

국가가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 그렇다. 무슨 아프리카 대륙의 (사실상 무정부 상태인) 몇몇 국가나 남미 소재 국가, 동남아 일대 국가를 예로 들며 대한민국이 얼마나 훌륭한 나라냐 반박하는 건 정말 무의미한 처사다. 한국의 비교 대상은 그런 불안정한 국가 내지 빈곤 국가가 아니라 적어도 한국만큼, 또는 한국 이상으로 잘사는 나라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야 이미 가정을 꾸린 지 30년이 되셨으니 그렇다 쳐도, 만약 아직 결혼하지 않은, 또는 막 결혼한 이가 아빠의 소속 회사에 입사했다고 가정해 보자. 배우자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애를 낳으려고 할까? 일주일에 6일을 일하고, 그마저도 사장 지시에 따라 휴가 일자를 정해야 하는 회사에서 어느 누가 "저 이런 직장 다니는데 결혼해주세요." 하고 말할 수 있겠으며, "여보, 우리 아이 갖자. 한 명은 적으니까 둘은 낳자." 하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면 미안하지만 그런 사람은 애국자가 아니라 정신 나간 사람이다.

당장 출산율 0.7명대의 초유의 기록을 달성한 나라가 한국이다. 사람들이 말로는 위기라고, 상황이 심각하다고 한다. 그런데 고용주들의 태도를 보면 그저 조금이라도 돈 더 벌 생각만 하지 국가 존망이고 뭐고는 안중에도 없다. 원래 인간이 그런 존재라 이해는 되는데, 요즘 애들을 너무 안 낳는다고 말이라도 할 거면 최소한 본인 회사 노동 환경이 얼마나 개판인지는 좀 인지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안 그래도 기껏 휴가 써서 여행 가려고 해도 토-일요일 양일을 껴서 가는 게 한국이다. 이런데도 뭐 애를 안 낳아서 나라가 망해 간다느니, 요즘 애들은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없다느니, 이런 말을 하면 양심에 안 찔리나?


개인적으로 근 몇 년 간의 경험을 통해 좌파에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음에도(본인의 브런치 글을 조금이라도 본 이용자는 아실 것이다), 현 대한민국은 노동 문제에 있어서는 무조건 진보적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리 남의 돈 받고 일하더라도 법으로 정해진 제 권리는 주장할 수 있고, 고용주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계약인 것이지, 내가 너한테 돈 주니까 내가 요구하는 대로 하라는 심보는 도대체 어떻게 먹게 된 건지? 이건 '영주'로서 노동자를 '농노'로 부리겠다는 심보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 나라의 수많은 고용주가 본인의 사업체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적잖게 갖고 있을 것이다. 본인 손으로 일궈낸 소중한 나의 회사가 아닌가?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 나라의 상황이 이 모양이 된 데에는 그 자긍심 넘치는 고용주들의 탓이 큼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하기 좋은 나라는 당연히 살기 좋은 나라다. 그런데 그 일을 할 사람이 대폭 줄고 있다. 지금은 많아서 그렇게 깐깐하게 굴고 또 부려먹는지 모르겠으나, 20년 뒤만 돼도 생산 가능 인구는 지금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좋은 고용주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면, 생각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이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것에는 왜곡되고 막돼먹은 기업 문화가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 많은 기업에 아주 높은 확률로 당신의 기업도 해당한다.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한, 당신은 평생 젊은 사람들 욕만 하면서 노동자 굴리는 맛에 나라 망하는지도 모른 채 떵떵거리며 살 것이다. 내 장담한다.




한국이 이리도 빠르게 무너져내리는 것은 그 어떤 외부 세력 탓이 아닌 바로 한국인 자신 때문이므로 정치인 탓을 하며 그들이 정치를 이 모양으로 해서 나라가 무너진다고 할 필요가 없다. 정치인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삶의 질을 좌우할 능력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는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이 나라의 사업자로서 노동자를 고용한 이들도 결코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무릇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자신을 모욕하고, 가정은 스스로 훼손한 후에 남이 그것을 훼손하는 것이며, 제 국가는 스스로 무너뜨린 후에야 남이 그것을 무너뜨린다.

(夫人必自侮然後 人侮之, 家必自毁而後 人毁之, 國必自伐而後 人伐之. /『맹자』<이루(離婁)> 상편 中)

작가의 이전글 크리스마스의 근현대적 변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