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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희 Sep 01. 2021

진보 정치가의 두 타입,
페리클레스와 그라쿠스 형제

상식의 재구성, 상식의 모자이크, 1번 조각



대통령 선거 시즌으로 돌입하면서 새로운 또는 해묵은 쟁점들이 지뢰 터지듯 하고 험한 말들이 파편처럼 튀는 시절, ‘혼돈의 한국사회 여행자를 위한 씽킹맵’, 그 상식의 지도를 구성하는 모자이크 첫 번째 조각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 이야기를 골랐다. 우리는 거기서 민주주의에 대한 최초의 상상력, 그 시행착오의 기록들을 만날 수 있다. 대한민국 1987년, before와 after.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했던 시절에도,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된 다음에도, 문제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란 ‘공통의 욕망이라는 공동체의 목표를 공동으로 추구하는 기술’이라 한다. 그리스와 로마는 2~3천년 전에 그 기술을 개발하고 실험했던 사회였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속담은 ‘현지의 관습과 문화를 존중하라’는 뜻이라고들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동시대 다른 지역에 비해 공화정 로마가 너무 달랐다는 뜻이었다.

민주주의 제도의 원형들과 더불어 정치가의 전형적인 타입들을 발견하는 재미. 도시국가 아테네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정치 9단’ 페리클레스와 로마의 귀족정치에 도전했다가 참살당한 비운의 개혁가 그라쿠스 형제. 진보 정치인의 두가지 정반대 타입이다.    

진화하는 역사, 움직이는 사회에서 진보 정치가의 역할은 필수다.

사회가 끊임없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불평등과 불공정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들에게 비전을 제공한다. 그러니까 도덕지수가 높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진보 정치가는 언제나 도덕군자여야만 할까. 정치는 가끔, 아니 꽤 자주, 권모술수와 막후협상의 달인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은 매일매일의 미디어를 통해 잘 드는 메스 대신 나무칼을 사용하는 수술 장면을 관람해야 할 것이다. 지금 정치 뉴스가 점점 하드고어 스릴러를 닮아가는 건 '나무칼 수술'을 하는 정치인들이 많다는 뜻이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의 민주화 1기를 지나 한국의 민주주의가 다음 단계로 접어든 지금은 진보의 유권자들도 진보의 정치인에 대한 판단기준과 기대수준을 조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      

(다음은 <상식의 재구성 – 한국인이라는 이 신나고 괴로운 신분> P. 201~204의 내용.)




Ⅳ, 진보 정치가의 두 타입, 아테네의 페리클레스와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


태평성대를 누린 ‘정치 9단’ 페리클레스와 비운의 개혁가 그라쿠스 형제.

아테네에서 페리클레스의 시대인 BC 457~429년 사이 30년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절정기이자 문화예술의 황금기였다. 그리스 철학의 요람이 이오니아에서 아테네로 옮겨온 것이 이 시기였다. 아테네가 스파르타 지배 아래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직전이었으니 ‘시들기 전의 만발한 꽃’과 같던 시기였다.   

페리클레스는 명문 귀족 출신의 백만장자였지만 민중파의 지지로 정계에 진출한 진보  정치인이었고 30년 동안 거의 해마다 스트레타고(국가전략담당관)에 선출되고 의장을 맡아 아테네의 1인자로 군림했다. 민주주의를 포식한 아테네나 로마 시민들은 지도자 한 사람의 권한이 비대해지는 걸 용납하지 않았고 자유로운 만큼 변덕도 심했다. 그럼에도 매년 다시 선출됐으니, 경쟁상대가 될 만한 정적이 없었다는 얘기다.

귀족이나 평민이나 모두 페리클레스가 자기편이라 믿었는데, 그는 해상무역을 보호해 부자들의 환심을 사는 한편 모든 분야에서 신분차별을 철폐하는 혁신정책으로 평민들의 인기를 얻었다. 아테네의 극장들을 국고로 지원해 누구나 공짜로 들어갈 수 있게 했고 아테네는 그리스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급하면 돈으로 표를 사모으기도 하고 정적들 여럿을 도편추방으로 보내버렸던 권모술수의 대가였다. 유명한 웅변가였으니 필요할 땐 포퓰리스트의 재능을 발휘하기도 한 것 같다. 페르시아전쟁으로 파괴된 아크로폴리스에 파르테논 신전을 지을 때 예산낭비라는 비판이 일자 그는 “남은 공사는 내 개인재산으로 하겠다. 대신 신전에 내 이름을 새겨 넣겠다”고 해서 시비를 잠재웠다.

 페리클레스 시대는 결코 평화로운 시절이 아니었다. 호전적인 스파르타가 아테네 패권에 도전해오면서 큰 전쟁이 잇따랐던 시기였다. 전쟁 때마다 그는 총사령관으로 전쟁에 나갔고 아테네 내정은 전쟁을 둘러싸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싸우느라 시끌벅적했다. 그는 끊임없이 정치공세와 법정다툼에 시달렸는데 정적들은 페리클레스를 겨냥해 측근들을 걸고 넘어졌다. 그의 측근들은 횡령 또는 권력남용, 성추문 따위로 기소됐고 아테네의 건설계획 책임자였던 페이디아스는 감옥에서 죽었다. “태양은 불타는 돌덩어리”라 했던 아낙사고라스는 페리클레스의 절친이었는데 신에 대한 불경죄로 고발당해 아테네에서 추방됐다.

BC 430년 여름, 아테네에 전염병이 돌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정적들이 총공세를 폈고 그는 스트레타고직을 박탈 당했다가 다음해 다시 선출되지만 역병으로 두 아들을 잃고 자신도 세상을 떠난다. 개혁가이면서도 영리하고 노홰했던 한 정치인의 손에서 몰락 직전의 아테네가 전성기를 맞았던 것이다.       


한편, 로마 공화정 말기의 개혁가 그라쿠스 형제가 있다. 호민관이었던 형제는 귀족계급의 재산과 특권을 정조준했다가 원로원의 폭력적 반발에 차례로 희생됐다. 아버지는 평민 출신 집정관이었고 어머니는 포에니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의 딸이었으니 그라쿠스 형제는 귀족적인 환경에서 자랐지만 평민계급의 대변인이 되는 쪽을 택했다.  

BC 133년에 네 명의 호민관 중 하나가 된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농지소유 상한제’를 도입한다. 귀족들은 국유지 임차면적이 보통 농민들에 비해 열배 스무배 이상이고 친척이나 해방노예의 이름으로 농지를 차명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한도 이상의 토지와 부정 임차 농지를 환수해 무산자와 자작농에게 분배하는 이 법은 무산자들을 자영농으로 복귀시키고 실업자를 구제하고 군사력을 보강할 수 있는 방안이라 원로원도 내놓고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식민지 통치 등 원로원의 특권에 잇따라 도전해오자 원로원이 술렁이고, 그라쿠스가 재선에 도전한 호민관 선거날 최고제사장과 원로원 의원들이 하인, 노예들을 몰고 투표장으로 쳐들어갔다. 티베리우스는 300명의 개혁파들과 함께 살해돼 시신이 테베레 강에 버려졌다. 로마 공화정이 시작된 이래 최초의 유혈사태였고 호민관이 살해되는 일도 처음이었다. 원로원은 평민층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최고제사장을 해외추방했다.

다시 10년 뒤인 BC 123년,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선출됐고 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그동안 유명무실해진 형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을 되살리는 작업에 착수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 귀족계급에 유리한 투표방식을 바꾸는 선거제도 개혁, 식민지민의 지위에 관한 시민권 개혁까지 로마 사회의 구조를 손보는 단계에 이르자 역시 원로원이 반그라쿠스 전투태세를 갖춘다. 그리고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의 우발적인 살인사건을 빌미로 ‘비상사태’를 선언한다. 이 역시 로마 역사상 처음이었는데, 비상사태 아래서 반역자와 폭도는 재판 없이 죽여도 되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목에는 현상금이 붙었다. 집정관은 군대를 동원해 그라쿠스 지지자들의 학살에 나섰고 희생자는 3천명에 이르렀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머리는 로마의 포로로마노 언덕 위에 내걸렸고 몸뚱이는 형처럼 테베레강에 던져졌다. 원로원은 여세를 몰아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고 나섰고 농지법을 비롯해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한 정책들은 모조리 폐지되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최초의 사회주의자’라 불린다. 당시 호민관은 임기가 끝나면 당연직 원로원 의원이 되고 그것이 평민들의 출세코스였지만 형제는 그런 길을 원치 않았다.

티베리우스가 호민관이 되던 해에 시칠리아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노예 검투사 스팔타쿠스의 반란이 그 50년 뒤였다. 로마가 해외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귀족들은 더 부자가 되었고 노예가 늘어나고 계급갈등은 더 심해졌다. 귀족들의 부패와 사치, 사회혼란과 폭력이 공화정의 말기적 증세였다.

형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고 목표가 분명했으며 독재자라는 비난에 흔들리지 않았고 반발은 정면돌파했다. 성급해 보였던 건, 연임한다 해도 호민관 임기 2년, 시간이 촉박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올바른 길이었지만 방법이 틀렸던 건지도 몰랐다. 둘 다 서른 남짓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은 훗날 거의 그대로 카이사르에 의해 실현된다. 60년 뒤인 BC 59년이었다. 갈리아 전쟁의 영웅 카이사르가 집정관이 되자마자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강력한 삼두체제를 등에 업고 첫 번째로 취한 조치였다.                



<<상식의 재구성–한국인이라는 이 신나고 괴로운 신분>>

 1장, 불평등 퍼즐

 2장, 미디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3, 민주주의 멀미    

 =8, 고대 그리스와 로마. 민주주의에 대한 최초의 상상력 

=Ⅳ, 정치가의  타입, 아테네의 페리클레스와 로마의 그라쿠스형제

 4장, 독일의 경우

 5장, 이념 트라우마

 6장, 일본 딜레마

  7장, 한국인은 누구인가.


                                                                                      

        http://aladin.kr/p/sPQ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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