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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희 Dec 23. 2021

파시즘의 유령

2022 대선과 윤석열의 '공정'  

파시즘의 유령이 2020년대의 한국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과거 40년 우리가 누린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다지 골조가 튼튼하지 못했다는, 위태롭기가 ‘쌓아놓은 계란’과도 같다는 사실을 새삼 돌아보게 되는 시절이다. 흔히 이익집단이라면 전경련이나 경총을 떠올리지만 지금 한국사회에서 최대 이익집단, 최고 권력집단으로 떠오르는 검찰, 마침내 그 집단이 대통령 선거에 자체 후보를 낸 꼴이다.     


최근 다큐멘터리 <노회찬6411> 시사회에서 어떤 지인이 이 영화에 제작비를 보탠 후원자 명단이 한도끝도 없이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을 보면서 “저렇게 많은 사람이 같은 마음인데 설마 윤 아무개가 대통령 되는 일은 없겠죠?”라고 했다. 적어도 이 다큐에 돈을 낸 1만2천여명, 이 다큐를 본 3만여명은 ‘검찰공화국’을 체감하며 치를 떨겠지만, 글쎄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이후 한국사회가 민주주의체제로 넘어왔다고 하지만 이것도 절반만 맞는 얘기다. 대통령선거로 야당이 여당 되고 여당이 야당 되니까, 다들 하고 싶은 얘기 하고 사니까, 이것이 민주주의구나 하는, 일종의 착시다. 시민들 손으로 대통령을 교체하면서 출범한 촛불정부라고 해도 공권력과 미디어의 보수우익 기득권 네트워크 앞에서는 마이노리티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일어났던 일들은 한국사회에 우익 파시즘의 뿌리가 얼마나 강고한지 말해준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자,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잃어버린 10년’동안 엎드려있던 공권력 기관들이 과감하게 활동을 재개했다. 군사정권 30년 한국사회를 쥐락펴락했던 공안통치의 근육이 10년을 쉬었다가 보수정권과 함께 회귀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정보원은 4년 동안 민간인 댓글부대 30개 팀, 3천5백명을 고용해 한달에 2억~3억원 인건비를 쓰면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댓글 알바를 시켰다. 국정원 ‘심리전단’의 ‘사이버외곽팀’이라는 이름의 이 댓글부대 활동은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 때 피크를 이뤘다. 이/박 정권 아래 국정원뿐 아니라 군 기무사와 경찰청도 대규모 댓글부대를 운영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청와대가 진보성향 문화예술인들을 지원대상에서 제외시킨 ‘블랙리스트’도 유명하지만, 거리시위나 야당정치인 낙선운동 같은 극우단체 활동에 전경련 돈 69억원을 지원하게 한 ‘화이트리스트’도 있었다. 대통령이 나서서 국가예산으로 극우세력을 양성한다는 건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다.     

 

윤석열은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 댓글조작을 수사하다 좌천됐지만 문재인 정권에서 발탁돼 중앙지검장이 되고 검찰총장까지 됐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가 공정하고 엄정한 소신파 검사라고 보았다. SK 최태원, 현대차 정몽구, 그리고 2017년 최순실 뇌물 사건으로 삼성 이재용까지 재벌총수 원투쓰리를 다 감옥에 보낸 경력도 타협을 모르는 정의파의 이미지에 어긋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이 소신파 검사는 결정적으로 ‘조국 사태’로 문재인 정권과 맞장떴다가 정치권의 벼락스타가 됐다. 대선은 다가오는데 마땅한 인물이 없어 바짝바짝 목이 타는 야권진영에 메시아로 떠올랐다. 이른바 ‘비선실세’의 국정개입과 역대급 부정부패로 불과 4년전 탄핵당한 정당이, 여전히 부동산갑부 의원들과 의정에대한 육탄 사보타지로 총선에서 참패한 정당이, 이미지가 오염된 제 식구들 대신 뉴페이스를 등판시켜 공정함, 정의파 마케팅으로 반전을 노린 것이다. 

윤석열은 3월에 검찰총장 사직하고 6월에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야당의 다급함과 본인의 야심이 접속, 절차무시 속도위반을 했다. 자신들의 지도자로 신인을 영입하는 일은, 정치라는 직업이 전문성 없고 훈련도 필요 없다고 선언하는 정치인들의 자기부정이다. 정치시스템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런 한탕주의의 후유증이 결코 만만찮다는 건 우리가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초보에게 과중한 정치적 권한을 떠안긴 후과는, 선거에 지면 그 정당이 고스란히 떠안을 것이고, 선거에 이기면 한국사회 전체에 파급될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재벌총수 정주영도 기업체와 경제단체와 체육단체의 대표로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어도 대통령이 되고자 했을 때는 정당을 창당하고 국회의원부터 했었다. 

윤석열은 출마 선언에서 "법과 정의,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겪었다"며 "국민들께서 그동안 제가 공정과 법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다 보셨다"고 말했다. 2019년에서 2020년에 걸친 이른바 ‘조국대전’을 관전한 국민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였다. 법, 정의, 공정, 법치. 이런 공명정대한 단어들을 자신을 설명하는데 끌어다 쓰면서 자신 같은 청렴결백한 공직자가 독재정권에 의해 쫓겨났다는 피해자의 서사를 완성하고 있다. 하지만 “제가 공정과 법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다 본 국민들에게 그의 ‘공정과 법치’는 퍼즐 같은 것이었다.  

2019년 이 검찰총장이 자신의 권한을 격투기 선수처럼 사용하기 시작하자 정치판은 혈투가 벌어지는 사각의 링이 돼버렸는데, 누구들은 거기서 자신의 권한을 초법적으로 휘두르는 야심가 본색을 발견하며 기가 질렸고 또 누구들은 현정권을 미워하는 자신들을 대신해 싸워주는 맹렬한 투사를 만나 반가워했다. 이 도전자가 챔피언의 코뼈를 뭉개고 코너로 몰아갈 때 환호하며 박수치는 이들은 그가 얼마나 공정하게 주먹을 휘두르고 얼마나 정의롭게 펀치를 먹이냐는 상관할 바 아니었다. 


히틀러가 정신분석의 주제로 인기를 끌지만, 역사는 늘 공명정대한 가치가, 명분이 이끌어가는 게 아니다. 인간 내면의 어두컴컴한 지대, 사악함과 이기심과 열등감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공적인 공간을 휘젓는 일이 꽤 자주 일어난다. 

검찰은 엘리트집단이다. 학교교육의 단계마다 연전연승해 서열 사회의 챔피언이 된 사람들의 집단인 만큼 서열싸움과 자존심경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시 합격해서 판검사 된 이들은 대학원 가서 법학 교수가 된 쪽을 한 수 아래로 보고, SKY 출신이 타대학 출신을, 판사가 검사를, 검사가 변호사를 아래로 보고, 같은 판검사라도 사시에 언제 합격했는지 따지고, 사시 동기끼리도 사법연수원 성적 따지고, 같은 기수라도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냐 설거지 코스 밟아왔냐를 따진다.

그처럼 위계가 강한 조직에서 시험에 계속 떨어져 남보다 9년 늦게 검사가 된 사람이 조직의 영웅이 되려는 소영웅주의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검찰개혁이라는 어젠다가 뜨고 조직이 존재론적 위기에 놓일 때야말로 영웅주의가 활극을 펼칠 최적의 무대가 된다. 

윤석열은 이른바 ‘특수통’ 강성 검사의 모델이다. 재벌총수를 감옥에 집어넣는, 삼성도 청와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의 상급자로 부임하는 법무장관 일가를 끌어묻을 수 있는 ‘칼잡이’라면 조직내에서 영웅으로 추앙을 받을만하다. 

쩍 벌어진 그의 다리가 쉽게 다물어지지 않는 것은, 재벌총수도 대통령도 법무장관 부인도 마음먹기 따라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것이 검사 중에서도 보통 검사가 아닌 바로 나, 이 윤석열이라는 오만함의 긴 시간이 이 습관을 교정불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재벌기업이나 장차관이나 국회의원을 상대할 때 일관된 ‘검찰지존’의 태도, 그것이 더러 바깥에는 ‘공정’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윤석열의 ‘공정’은 안철수의 ‘새 정치’처럼 정작 자신도 그 내용이 뭔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대한민국 정치지형에서 한때의 캐치프레이즈로 소비되는 그런 용어일 공산이 크다.    

  

‘공정’이라는 프로파간다 용어보다는 쩍 벌어진 다리와 눈을 깔고 보는 시선과 ‘임금 王’자 해프닝이 그의 본질을 더 잘 설명해준다. 준비된 연설보다는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말실수가 그의 본질에 더 가깝다. 

‘120시간 노동’이나 ‘불량식품’ 얘기할 때는 어느 깊은 우물에서 튀어나온 개구리가 바깥 세상에 대해 첫 인상을 발설한다는 인상이었다. 삼국지 질문에 동문서답 할 때,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바, 법전 외에 이렇다 할 독서가 없는 교양문맹이라는 신분을 커밍아웃했다.  

그가 아내를 선택한 기준이나 그 아내의 도덕불감증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이제 정치를 하겠다고 나왔는데, 그것도 최고급 정치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왔는데, 정치에 문맹이라는 점이고 시대착오적 정치관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그는 전두환이 정치는 잘 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는 저유가, 저달러, 저금리의 이른바 ‘3저 호황’이어서 실제로 좋았던 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흔히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리는 2차대전 후 고성장 시대가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가 지휘하는 신자유주의 캠페인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 구미 국가들에 비해 20~30년쯤 늦게 고성장 트랙에 올라탄 후발주자 한국은 적어도 1980년대엔 아직 엑셀을 밟을 시간 여유가 있었으니 전두환은 운이 좋았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두 번의 군사쿠데타를 겪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1961년 박정희는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스톱시켰지만 대통령제 개헌을 하고 직선제 선거에 후보로 나가서 간발의 차이로 당선됐다. 상대후보 윤보선과 1.5% 차이였으니 여차하면 그가 대통령이 안될 수도 있었다. 나는 그가 ‘조국 근대화’를 5.16쿠데타의 명분으로 내걸었을 때 실제로 일인당 국민소득 1백불의 후진국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진정성이 있었다고 본다. 반면, 전두환은 쿠데타로 군을 장악한 다음 광주의 시위를 내란 수준으로 키워 1천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내란음모와 북괴남침설로 ‘국가보위’라는 명분을 만들었고 체육관에서 열린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됐다. 정치적으로 가장 야비한 집권경로를 택했다. 대통령이 된 것은 어떤 시대적 소명보다도 군사정권을 존속시켜야 한다는 정치군인 20년의 관성이었다. 

전두환이 정치를 잘 했다는 건 역사 무지렁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대통령 후보가 이런 정치관을 피력했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과가 아니라 사퇴다. 

사과 요구에 ‘엿 먹으라’는 식의 리액션을 한 건 왜 사과를 해야 한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실수라면 사과하겠지만 이건 무지의 소치라 해도 소신 발언이고 그 자신과 그를 둘러싼 그룹의 정치관인 것이다. 가령 청와대 축소나 부동산 규제완화보다도 더 리얼리티 함량이 높은 공약인 것이다. 

전두환 발언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윤석열은 체질로 보면 전두환 계보다. 그가 검찰총장이 되면서 ‘윤석열 사단’이라는 정치검사 집단이 주목받게 됐는데, 공직사회에 ‘아무개 사단’의 존재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김영삼 대통령이 해산시킬 때까지 30여년 육군 안에 존재했던 정치군인 집단 ‘하나회’도 말하자면 ‘전두환 사단’이었다. 

그는 관훈클럽 토론에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인사검증에 “모든 정보와 수사라인을 동원”하겠다고 했다. 국정원이 국내인사에 대해 정보수집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 그가 그것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고 그것을 인사검증에 쓰겠다고 했는데, 통치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파시스트의 사고방식이다. ‘김기춘 주니어’라 할까. 김기춘은 공안검사, 특수통의 대선배로, 박정희 정권에서 유신체제의 설계, 노태우 정권의 김기설 유서대필, 박근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 등 공작정치의 달인이다.  

사기성 비즈니스로 감옥을 들락거리는 그의 장모나 아내 김건희의 습관적인 거짓말도 끔찍한 일이지만 그보다 위험한 건 후보 자신이 파시스트라는 사실이다.  

욕망을 채우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내와 그는 완벽히 똑같은 캐릭터다. 아내가 법을 위반했다는 걸 알지만 아내의 일에 대한 질문들이나 사과 요구에 잔뜩 짜증나있는 것은, 그가 법 앞에 늘 ‘갑’이었지 ‘을’은 익숙치 않기 때문이다. 법은 자신이 요리할 때 쓰는 부엌칼 같은 것이고 자신이나 아내는 심리적 치외법권 지대에 속해있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어떤 태도로 한국사회를 대해왔는지, 이들이 최고권력을 가졌을 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려들 것인지, 기업인 출신 이명박이나 스타 정치인 박근혜와는 달리 체질상 정치군인에 가까운 그에게서 어떤 정치가 튀어나올지, 우익 정권과 재회한 공권력 기관들 안에서 어떤 못된 옛날 습관이 튀어나올지,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프랑스혁명은 1789년 한해의 일이 아니었다. 수천년 군주제를 민주주의로 바꾸는 혁명은 1백년에 걸친 길고도 험난한 과정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부적응과 반혁명의  혼란 속에서 프랑스인들은 절대군주 시절이 그리워 나폴레옹에 열광하기도 했다. 

30년 군사정권을 졸업한 한국의 민주화도 1987년 한해의 사건이 아니다. 1987년에 민주화의 여정이 시작됐을 뿐이다. 성숙한 민주주의의 다음 단계로 진화해야 하는 지금 한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대화와 타협의 리더십이다. 자기확신과 비타협의 소영웅주의 캐릭터는 거꾸로 가는 정치가 유형이다. 정쟁에서 부각된 ‘이슈맨’이 대통령 후보로 떠올려지는 것도 정치후진국에서나 가능한, 정치양극화가 빚어낸 기이한 풍경이다. 이야말로 민주주의 위기의 한 징후다.  

어쩌다 시대착오적인 대통령을 뽑게 된다면, 우리는 87년 6월을 다시 한번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검사들이 군사정권의 머슴 노릇 할 때 시민들이 최루가스 마시고 길바닥에 눈물 콧물 흘리며 군부로부터 민주주의를 되찾아놓은 것은 일부 정치검사 집단으로 하여금 법을 사유화하면서 시민들 위에 군림하라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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