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적어도 한 번쯤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 일부를 가리거나 찌그러트려봤을 것이다. 다이어트나 성형 수술 등을 상상하며 컴플렉스를 일시적으로 고쳐보는 것이다. 하관, 턱, 볼을 가려보거나 쌍꺼풀을 만들어보거나 코를 세워보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확인한다. 보통은 불만족스러운 모습이 거울에 투영되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것 같다는 괜한 기대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마스크걸>의 이 장면은 조금 이상하다. 특정 컴플렉스가 아닌 자신의 얼굴 반을 가려버린다. 주인공이 얼굴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나, 그렇다고 얼굴의 반을 날려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 과도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왜 저런 모습으로 얼굴을 바라볼까? 개인적으로는 저런 행위가 조금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나도 저렇게 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게 뭘까?”이다. 상반신 위에 달려 있다. 가지각색의 크기와 모양을 가진다. 이목구비가 위치해 있다. 이목구비의 크기와 모양, 위치도 모두 다르다. 고작 모양이 조금 다를 뿐인데 왜 이렇게 나를 고통스럽게 할까. 제멋대로 자리 잡은 이목구비에는 나의 어떠한 의지도 반영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죄처럼 작용하는 걸까. 그래서 그냥 없애보는 것이다. 눌러보고 꼬집어보고 가려본다. 이해해 보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해는 요원하다. 얼굴은 고통이고, 고통은 얼굴에 남아있다.
지금의 나는 다행히도 이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든 관계에서의 고통을 외모 탓으로 돌렸던 철없던 어렸을 때와는 달리, 이 꼬락서니도 아껴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과거보다는 자신을 덜 혐오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외모지상주의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숨 쉬듯이 나와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며 고통받고 고통을 준다. 어떻게 하면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스스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가능할까? 독서나 교육, 정신적 수련으로 닿을 수 있는 영역일까?
이런 고민을 안고 있는 나의 이목을 이끄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단편들 중 마지막 편인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이다. 이 단편은 칼리아그노시아라는 장치가 개발된 가상의 미래를 다룬다. 칼리아그노시아(calliagnosia)란 실미증을 뜻하며, 미나 선을 뜻하는 접두사 calli와 실인증(지각 기능이 온전함에도 불구하고 뇌의 통합 기능의 손상으로 인해 시각이나 청각 자극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증세)을 의미하는 agnosia를 결합한 조어이다. 칼리아그노시아는 착용자로 하여금 얼굴에 대한 실미증을 일으키게 한다. 칼리 사용자는 얼굴을 구별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책의 내용을 스포 할 수는 없고, 이 글에서는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칼리아그노시아 장착 의무화에 대한 찬반 주장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작은 실마리나 앞으로의 방향성은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에서 출발하는 글이다.
칼리아그노시아 의무화 찬성 의견
어린 나이에 외모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는 감당하기 어렵다. 나이를 먹고 외모 문제에 관해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칼리의 장착 여부를 스스로 다시 결정하면 된다.
외모는 스스로의 능동적 의지가 아닌 타인의 기대에 의해 발생하는 수동적 특성이다. 외모에 관한 고민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곧 수동적 인간이 되는 것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
육체적 아름다움은 개인의 매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사랑에 빠지고 성적 욕구를 느끼는 데에 있어 실미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얼굴에는 육체적 아름다움과 구별되는 개인의 성격, 개성이 반영되며 우리는 이것에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도리어 육체적 아름다움을 넘어서 좀 더 본질적인 아름다움에 닿을 수 있다.
매력적인 외모가 긍정적 평가와 사회적 성공을 뒷받침한다는 것은 이미 수차례 연구를 통해서 증명되었다.
도리어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것은 칼리가 아닌 육체적 아름다움이다.
모두가 육체적인 아름다움이 인간의 장점과 무관함을 교육을 통해 알고 있으나 여전히 외모지상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나 마게팅을 거치면서 중독적인 쾌락으로 변모했다. 이는 시각적 마약과 같은 것으로 미적 수용기의 진화로 얻은 처리 용량을 초과하는 자극을 주며 타인과의 관계를 헤친다.
타인의 호의나 악의의 근거를 외모에서 찾을 필요가 없게 된다.
스스로가 못생겼고 부족하다는 자의식,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칼리아그노시아 의무화 반대 의견
필요한 것은 눈가림이 아니라 교육이다.
아름다움을 음미하는데 적절한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이 있다. 하지만 칼리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차단한다. 설령 기술이 발달하여 그런 상황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의지가 아닌 시스템의 판단에 불과하다.
칼리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걸 가진 사람들을 벌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만약 칼리가 옳다면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모든 예술 영역도 실인증 조치를 취해야 한다.
아름다움은 가진 사람뿐 아니라 그걸 보는 사람에게도 축복이다. 이를 치환하거나 차단하려 할수록 우리의 문화는 더욱 빈곤해질 것이다.
칼리는 미적감각을 마비시킬 우려가 있다.
칼리는 여성 권익 신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이 자신의 용모에서 기쁨을 얻는 행위 자체에 죄악감을 느끼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칼리가 아닌 모든 여성이 기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개념 재정립이다.
경험의 폭을 줄이는 방법으로 사람을 해방시킬 수는 없다. 이는 전체주의적인 방식이다.
칼리는 젊음의 아름다움을 앗아갈 것이다.
칼리는 도리어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 칼리를 모든 사람들이 100% 사용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칼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를 외모로 차별해도 칼리를 낀 사람들은 이를 인지할 수 없다. 즉, 차별을 인지하고 이를 막을 수 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기타 의견
외모지상주의는 외모의 아름다움과 육체를 예찬했던 고대 그리스가 원류이다. 육체를 평가절하하고 영혼을 높이 보는 것은 일신교(유대교, 기독교, 천주교 등)의 전통이다. 이 둘은 오래전부터 이어진 상반된 충동이다. 결국 칼리를 착용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 사이의 적절한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문제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만약 칼리아그노시아라는 장치가 개발되고 의무화에 대한 법안이 발의된다면 당신은 어디에 표를 던질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찬성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고귀한 사명으로 포장한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또한, 선택의 여지없이 강제로 감각을 차단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방식이라는 의견에도 동의하며, 감각의 차단에서 비롯되는 부작용 역시 두렵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다면, 현대 사회가 마케팅을 통해 끊임없이 주입하는 아름다움은 너무나 쉽고 강력한 것에 비해 이에 저항하는 수단인 교육은 어렵고 힘들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Examples of lies in society: I need to be pretty to be happy. I need surgery to be pretty. I need to be thin, famous, fashionable.
Our young men, today, are being told that women are whores. Bitches. Things to be screwed. Beaten. Shit on. Shamed.
This is a marketing holocaust. Twenty-four hours a day for the rest of our lives, 'the powers that be' are hard at work dumbing us to death.
So, to defend ourselves and fight against assimilating this dullness into out thought processes, we must learn to read.
To stimulate our own imagination. To cultivate our own consciousness. Our own belief systems.
We all need these skills to defend.. to preserve our own minds.
영화 <디태치먼트> 대사 일부 (영상 1분 11초부터)
Ubiquitous Assimilation: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것
Doublethink: 이중사고, 서로 반대되는 신념을 동시에 진실이라고 믿는 것
이러한 마케팅의 영향력을 영화 <디태치먼트>에서는 마케팅 학살로 표현했다. 마케팅 학살 (Marketing Holocaust)이란 사람들에게 올바른, 멋진, 유행하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주입시킴으로써 개인의 신념과 욕구를 지우고 거기에 미디어가 권장하는 이미지를 채워 넣는 것을 말한다. 미디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본연의 욕구를 흡수당하고 미디어가 제공하는 이미지를 흡수한다 (Ubiquitous Assimilation). 만약 마케팅에 학살당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마케팅이 거짓임을 앎에도 이를 거부할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 마음속에 마케팅과 반대되는 상상, 사상, 신념, 의식을 함양함으로써 (Doublethink)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 시각적 마약은 더더욱 진보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을 학살하고 다니고 있으며, 이중사고를 위한 독서나 교육은 갈수록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마케팅 기술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진보된 기술인 칼리와 같은 장치뿐인 걸까? 그러나 아직 칼리는 개발되지 않았고 우리가 가진 유일한 방어 수단은 여전히 독서나 교육에서 비롯한 이중사고뿐이다. 답이 없다고 그냥 글을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무책임하니 내가 아는 몇 가지 이중사고 예시를 적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이중사고.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년 1월 12일 ~ 1995년 12월 25일)는 ‘타자성의 철학’을 개진한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에서 주요한 개념 중 하나로 '얼굴'이 등장한다. 얼굴은 신체의 일부를 가리키기도 하나 동시에 존재자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인격과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즉, 레비나스는 얼굴을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개별적 존재자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말로 보고 있다. 이러한 얼굴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닌 시간 속에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얼굴은 존재자의 살아온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 주는 것으로 어떠한 목적도 가지지 않은 정직한 것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거울에 비치는 얼굴에는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는 이목구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내가 마주한 타인의 얼굴, 오고 간 감정, 겪어온 경험, 삶이 녹아들어 있다. 컴플렉스로만 여기던 눈이나 코 같은 곳에 사실은 누군가의 사랑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얼굴은 인격이며, 존엄성이고, 그 자체로 나다. 그 생김새가 사회적 기준의 미에 부합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모든 얼굴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두 번째 이중사고 예시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악뮤의 노래 <못생긴 척>이다. '나는 잘생겼지만 세상이 나를 못생기게 만들고 싶어 하니 온 힘을 다해 못생긴 척을 해주겠다'. 나는 이보다 더 간결하면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가사를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우리가 겪고 있는 외모에서 기인한 모든 고통은 단순히 최선을 다한 못생긴 척에서 비롯한 후유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렇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 고통으로부터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