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당시 관람했던 <윤희에게>는 나에게 대단히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기쁨과 슬픔이 한데 얽혀 벅차오른 상태로 영화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어떻게 좋았냐'라고 물어보면 거기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파편적인 감상을 늘어놓으며 아무튼 좋았다를 내뱉을 뿐이었다.
그 후 윤희에게 보다 훨씬 먼저 개봉했던 <캐롤>이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를 너무 대충 봤던 탓일까, 좋지도 나쁘지도,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과 평단 모두 나와는 사뭇 다른 평가를 내렸다. 두 그룹 모두 캐롤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반면 윤희에게는 상당한 팬덤을 형성하긴 했으나, 평론가 분들의 평은 상대적으로 그렇게 좋진 못했다. '한국의 캐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캐롤보다는 부족한' 정도로 요약되는 것 같았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반론을 제기하기엔 별다른 옹호 논리가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그래 니들 잘났다'라고 체념해 버렸다.
최근 모종의 계기로 두 영화를 연속으로 다시 봤다.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 번째, 캐롤은 내 기억보다 훨씬 좋은 영화였다. 두 번째, 그래도 나는 윤희에게가 더 좋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민을 조금 더 해보기로 했다. 윤희에게가 이룩한 것은 무엇인가, 너무 거창하다면, 윤희에게에서 내 마음에 와닿은 것은 무엇인가
스포주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윤희' 앞으로 도착한 한 통의 편지. 편지를 몰래 대신 읽어본 딸 '새봄'은 편지의 내용을 숨긴 채 어머니에게 발신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영화는 우연히 전해진 편지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전해진 답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 편지를 주고받기까지 20년의 세월의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서로를 향한 마음은 편지지 안에 접혀 납작하게 눌려있어야만 했다. 윤희와 쥰에게서는 여타 퀴어 영화에서의 투쟁이랄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무기력하게 일을 하고, 스쳐 지나간 남자에게 분노하고, 남은 가족에게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 사랑을 마저 주는. 20년의 세월을 알지 못하는 혹자에게 이들은 그냥 납작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영화가 하려는 일은 윤희와 쥰이 겪은 억압이나 이에 맞서는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휩쓸고 간 후의 흔적,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빛바랜 것들, 고작 편지지 몇 장 겨우 들어갈 편지 봉투의 작은 틈을 열고 그 사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 캐롤은 기차의 도착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캐롤의 이야기는 마치 장난감 기차가 조그만 레일을 타고 한 바퀴를 돌아 출발역에 돌아오듯이 원을 그리며 처음으로 되돌아온다. 윤희에게 역시 기차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캐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가 시작할 때 기차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기차는 그전부터 달리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윤희에게의 기차는 캐롤에서 처럼 원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20년 동안 멈추지 못하고 지금까지 달리고 있다. 계속해서 윤희와 쥰의 곁을 스쳐 지나가던 기차는 일본의 눈 덮인 작은 마을로 향한다. 기차는 마침내 종착역에 도착한 걸까? 알 수 없다. 우리는 기차가 멈춘 것을 보지 못했고, 철로는 눈에 덮여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윤희는 목도리를 둘러맨 새봄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두르고 있지 않다. 하얗게 드러난 목은 새봄의 두터움과 대비되어 더욱 춥고 외로워 보인다. 하지만 오타루에서는 둘의 목도리가 바뀐다. 오타루에서의 새봄은 녹색 목도리 대신 새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사랑, 유혹, 정열로 불타오르듯이 이글거리던 캐롤의 붉은색은 새봄의 목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듯하다. 윤희에게 따스함을 내어준 새봄은 이제 하얀 눈 위에 붉은 희망으로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새봄의 턱까지 감쌌던 그 녹색 목도리는 오타루에서 윤희의 목에 둘러져있다. 어린 새봄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던 목도리는 이제 윤희를 감싸 안아 그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윤희는 오타루로 향하면서 쥰을 만났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윤희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 도달한 오타루는 온통 눈으로 덮여있다. 서로를 향한 그리움은 녹지 않고 쌓여 마침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눈은 언제쯤 그칠까? 키보다도 높게 쌓였음에도 그칠 줄 모르는 눈은 한없이 답답하고 막막하다. 눈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불편함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분명 아름답다. 한없이 내리는 눈은 막막함과 동시에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이는 윤희와 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20년이 흘러 감정조차 잘 느껴지지 않는 둘의 모습은 막막하고 답답하다. 하지만 그 저변에 있는 서로를 향한 사랑은 눈부시게 하얗고 아름답다. 그래서 눈 덮인 마을의 모습은 아름답다. 이들의 마음도 그렇다.
눈 덮인 오타루 위로 달이 떠있다. 쥰은 초승달을, 윤희는 보름달을 바라본다. 그리움은 눈처럼 쌓이고, 달처럼 차오른다. 달 역시 서로를 향한 그리움이다. 쥰이 초승달을 발견하게 해 준 건 료코이다. 료코는 쥰에게 달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녀는 쥰의 사랑을 원한다. 하지만, 쥰은 달을 보며 료코가 아닌 윤희를 떠올린다. 쥰은 달을 보고 돌아와 고모 마사코를 껴안는다. 윤희가 보름달을 발견하게 해 준 건 만취한 남성이다. 그는 술에 취해 문 앞에서 쓰러져있던 전남편 인호를 떠올리게 한다. 인호 역시 윤희의 사랑을 원한다. 하지만, 윤희는 달을 보며 인호가 아닌 쥰을 떠올린다. 옆에는 새봄이 함께 하고 있다.
영화에서 납작한 인물로 보였던 것은 비단 윤희와 쥰뿐만이 아니다. 새봄 역시 영화 중반부까지 단일한 톤을 유지한다. 그녀는 항상 어딘가에 불만이 차 있는 것처럼 보이며, 누군가를 대할 때에도 짜증이 깃들어 있다. 얼핏 봐서는 단순 반항하는 사춘기 청소년 정도로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새봄은 그 누구보다도 깊은 고민을 안고 있다. 그녀에게 절실한 것은 어머니와, 남자친구 두 사람에 대한 이해이다. 윤희는 힘도, 원하는 것도 없어 보인다. 또한, 사진을 인화해 주는 친절한 삼촌, 멀쩡한 직장도 있고 아직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버지와도 극단적으로 거리를 둔다. 남자친구 경수는 분명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대학교 입학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는 손을 놓고 한없이 무기력해지기만 한다. 새봄은 윤희와 쥰을 만나게 해 주면서 스스로도 사랑하는 둘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나간다.
새봄의 노력으로 마침내 윤희와 쥰은 편지를 주고받는다. 편지를 쓴 사람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편지를 전달해 준 사람도 중요하다. 쥰의 편지를 윤희에게 전해준 마사코, 쥰의 편지를 읽고 윤희가 답장을 쓰게 해준 새봄. 둘은 눈 내린 마을의 우체국처럼 서로의 편지를 전달해주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스스로 질문을 많이 했고,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임대형 감독의 말처럼 윤희와 쥰, 뿐만 아니라 새봄과 마사코까지 모두 사랑에 대해 질문하는 인물들이다. 마사코는 첫사랑과 좋아하는 것이 맞지 않아 헤어지게 되었다. 새봄은 남자친구를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다. 모두 사랑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봤거나, 지금도 고민중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둘은 윤희와 쥰의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에게, 둘의 사랑을 이해하고 기꺼이 전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봄은 윤희의 사진을 찍는다. 코트를 입고 담배를 피는 모습, 담요를 두르고 추위에 떠는 모습, 이력서를 들고 식당 뒷문에서 망설이는 모습까지. 첫사랑을 향한 슬픔과 그리움, 꿈을 향한 불안과 기대. 새봄의 앞에는 억눌려왔던 어머니가 아닌 윤희라는 한 사람이 서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카메라에 다 담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새봄은 기쁜 표정으로 셔터를 누른다. 억압의 대가로 어머니가 할머니로부터 받았던 카메라엔 이젠 윤희라는 한 여성의 아름다움이 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