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나루세 미키오'와 영화 <흐르다>에 대하여
지난 4월부터 약 2달여간 대전 지역 청년 영상 창작자 커뮤니티 INK에서 연 씨네클럽에 참가했다. 씨네클럽의 주제는 일본의 3대 거장이라 불리는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다루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즐거웠던 경험이었지만, 그만큼 스스로의 저급한 심미안을 절실히 체감하여 속상하기도 했다. 나는 그냥 영화 보는 걸 조금 좋아하는 사람 정도이지 영화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INK 구성원 분들의 설명 덕분에 세 감독의 위대함의 편린이나마 엿볼 수는 있었으나, 그 감상을 글로 풀어내기에는 내 수준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이 글 서론에 INK를 언급해도 되는지 조차 정말 많이 주저했다. 그럼에도 염치 불구하고 씨네클럽을 서론에 써버린 이유는 이 수준 낮은 글의 탄생을 설명할 명분이 이것 말고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2달간의 경험이 그냥 휘발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몸부림이자, F학점이라도 면하고자 낙재생의 마구잡이로 작성하여 제출한 과제이다.
미조구치의 <산쇼다유>에서 사진의 인물 카야노는 주인공 남매 중 여동생 안주가 열고 도망간 문 밖으로 비틀비틀 걸어 나가 안주가 도망친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카야노는 주인공과 같이 일하는 노예들 중 한 명 일뿐 주요 인물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저 신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절함과 애틋함, 그리고 절망감을 느꼈다. 오즈의 <오차즈케의 맛> 말미에서는 모키치, 타에코 부부가 화해하는 신이 나온다. 공항에서 돌아온 모키치가 타에코와 함께 주방에서 오차즈케를 만드는, 단순한 부부 화합의 장면이다. 영화 초, 중반부에도 자주 등장했던 장소, 구도, 인물들이다. 그런데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이 신은 단순 화합을 넘어 일종의 환상감과 신비감, 그리고 약간의 공포감까지 선사한다. 존재하지 않는 장면같기도,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두 장면이 뭐가 그렇게 아름답고 위대하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그냥 머릿속에서 도저히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떠오를 뿐이다. 이런 감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영화 감상의 폭도 넓혀 보고 이런 씨네클럽 같은 것도 참가해 보는 것이지만, 보면 볼수록 시네마라는 미지의 심연만 발견하고 좌절하고 만다. 유수의 평론가들이 말하는 시네마의 위대함이 이런 게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만 해볼 뿐이다.
하지만 오늘 글의 대상은 앞서 말한 미조구치나 오즈가 아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이다. 나루세 감독은 다른 두 명의 감독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긴 하였으나, 그럼에도 여러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주제는 주로 일본의 시대상을 반영한 서사, 영화 전면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경계를 밟고 올라서거나 시공간을 초월하는 고양이, 미싱기<->샤미센/양복<->기모노/구두<->게다 등으로 대비되는 이미지, 골목에서 항상 놀고 있지만 정작 주인공 가족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등 흥미로운 주제들이 굉장히 많다. 하지만 내가 나루세의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바로 카메라이다. 싱글 쇼트 및 리버스 쇼트를 완전히 배제하는 미조구치, 정면에서 인물을 바라보며 보이스오버조차 허용하지 않는 싱글 쇼트를 쓰는 오즈와는 다르게 나루세는 화려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싱글 쇼트와 리버스 쇼트를 적극 활용한다.
쇼트 순서 (이미지 업로드가 순서대로 되지 않아 숫자가 뒤죽박죽)
#2 -> #1 (쓰타노가 중경으로 침입) -> #6 -> #5 -> #3 -> #4 -> #9 -> #12 -> #8 -> #11 -> 뒤돌아 선 오토요 싱글 쇼트 -> #3 -> #7 -> #3 -> #6 -> 오하루 싱글 쇼트 -> #2 -> #10 -> #5 (오버 더 숄더 쇼트가 아닌 싱글 쇼트) -> #10 -> #11 -> #2 -> #11
그렇다면 과연 4개의 쇼트는 누구의 시선일까? #3 쇼트의 방향 자체는 가쓰요가 있는 쪽이긴 하나, 각도와 거리감 모두 가쓰요의 시선이 될 수는 없다. 만약 가쓰요의 옆에 누군가가 가쓰요와 같이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테이블을 바라봤다면 #3과 같은 시선 쇼트가 나오리라 상상해 볼 수는 있다. #4, #7, #9는 모두 쓰타노가 개입하고 있다. 쓰타노가 오하루에게 술을 주문하여 생긴 쇼트 #4, 그 술을 가져다주려다 오토요를 마주쳐 생긴 쇼트 #9, 현관문 밖으로 나서는 마지막까지 비아냥을 멈추지 않는 오토요의 쇼트 #7. 모두 오하루와 오토요가 중심이 되는 쇼트들이며, 그 인과는 모두 쓰타노를 향해있다. 따라서 이 3개의 쇼트들은 물리적으로 쓰타노가 바라보는 시점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쓰타노의 시점처럼 느껴진다.
카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들을, 더 나아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의 시점까지 오가며 신을 조망한다. 이런 카메라를 '특정 조건에 따른 특정 인물의 시선이다'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가정은 해볼 수 있다. 만약 카메라가 거쳐간 수많은 시선의 주체를 단일 인물로 총화 할 수 있다면 그 인물은 어떤 인물일까? 이 질문에 대해 한 가지 답변만은 확실하게 할 수 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과 그에 따른 감정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카메라의 노력은 종종 영화적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던 인물의 감정은 마침내 분출하여 화면 전체에 발화한다. 카메라는 등 돌린 가쓰요의 감정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아버지를 떠올리고 요동치는 마음과 어머니에 대한 슬픔으로 흐르는 눈물은 천둥과 비가 되어 카메라에 담긴다. 감정은 인물을 넘어 화면 전체를 지배한다. 친절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러한 감정의 날씨화는 사실 카메라의 부단한 노력이 이끌어낸 결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