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나: 공간 배치 서울>전
전시가 열리는 공간에 적합한 장소 특정적 작품을 선보이는 이요나 작가의 <공간 배치 서울>전이 오는 8월 4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작가는 전 세계 도시 환경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재료인 스테인리스 스틸 배관을 일상적인 사물과 결합해 사회 구조 안에 존재하는 여러 이분법적인 구분과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의 작업은 공간이 가진 본래의 건축적 구조와 문법을 수용하면서도 작품이 전시되는 공간에 부여된 통상적 관념과 규범을 비틀어 공간의 수직적 위계와 수평적 경계들을 지워 나간다.
이번 전시에서 이요나 작가는 건축적 구조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작업적 확장을 시도한다. 특히 전시와 동일한 제목의 작품 ‘공간 배치 서울’(2024)은 미술관 바깥에 위치한 낮은 한옥에서 출발해 미술관 내부의 수직적인 계단을 타고 가장 높은 옥상정원으로 향하는 이동의 방향을 제시한다. 건물의 내부와 외부, 서로 다른 층계를 오가는 전시의 경로 사이에 침실 가구나 욕실, 주방, 미화 용품처럼 지나치게 사적이고 실용적이기에 전시장에서 보이지 않아야 할 것 같은 사물들을 놓음으로써 전시 공간이 가진 통념을 흩트린다. 공간의 위계와 구조를 뒤섞는 사물의 배치는 관객이 관람자로서 요구받은 행동양식에 스스로 질문하게 하고, 규범을 넘어 작품에 직접 반응하고 개입하기를 유도한다.
전시에 활용된 작은 한옥이 빼곡히 들어선 스테인리스 스틸 배관 조각으로 인해 공간으로서 기능할 수 없어진 데 반해, 넓은 옥상정원은 외곽에만 조각을 설치하고 중심부를 텅 비워 두어 두 공간의 밀도의 대비를 극명히 드러낸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뉴질랜드로 이주한 이요나는 두 국가가 가진 상반된 도시의 밀도와 일상의 속도를 각기 다른 시기에 교차해 경험했다. 서울의 복잡한 지하철 노선, 역과 역 사이의 촘촘한 간격, 분주한 환승역, 신호를 기다리는 인파와 줄지은 버스,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 풍경 등 작가 개인의 경험과 중첩해 인지한 도시의 움직임과 속도를 스테인리스 스틸 배관을 매개로 꿰어낸다. 또한 작가는 스테인리스 스틸 배관에 하차 벨이나 버스 손잡이, 신호등, 벤치 등 우리가 이동 중에 발견하는 사물들을 결합해 작품이 설치된 전통 한옥과 현대적인 미술관 건물에 쌓인 서로 다른 시간성을 지금 이 순간의 시간으로 작동하게 한다.
미술관의 건축 공간을 따라가는 이번 전시는 경로의 마지막 지점인 옥상정원 너머 서울의 실제 풍경으로 확장되고, 이요나의 작업은 도시 환경의 일부가 되어 어두워진 서울과 미술관 옥상정원의 밤을 비춘다. <이요나: 공간 배치 서울>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효율성에 입각해 점점 더 분리되어지는 공간과, 기술의 발전으로 압축되어 사라지는 시간을 이어보면서, 이분법적 사고와 개념의 경계들을 지우고,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도시에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장면들을 붙잡는다. 한편 전시는 공간에 대한 장소 특정적 개입을 시도하는 이요나의 작업을 통해 미술관의 유휴 공간을 활용하고, 건물에 위치한 여러 공간을 연결함으로써 미술관을 경험하는 관람자의 감각을 확장하고자 한다.
— 작가님은 스테인리스 스틸 배관을 주요한 작업 소재로 사용하시죠. 어떤 계기로 스테인리스 스틸 배관에 주목하게 됐고, 지금까지 작품의 주재료로 쓰고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2016년에 레지던시를 하며 서울에 몇 개월 지냈어요. 그때 정말 서울 구석구석을 많이 걷고 대중교통도 많이 이용했죠. 버스나 지하철, 택시를 타면서 거리를 다니다가 주목하게 된 게 스테인리스 스틸 배관이었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손잡이를 고정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거나 계단 손잡이로 쓰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죠. 화장실 수건걸이, 파라솔의 기둥, 대걸레의 손잡이로도 쓰이고요.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안과 밖처럼 다양한 공간을 넘나들며 배관 굵기에 따라 유연하게 쓰이는 모습에 이끌렸습니다. 재료의 강성이 좋으니 건축적인 스케일의 작업이 가능해졌고, 관람객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됐어요. 한 악기에 주어진 음역은 정해져 있지만 그 안에서 무한한 음악을 만들어 내듯이 스테인리스 스틸 배관은 제 작업에 풍부한 가능성을 선사해 주었죠.
—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미술관으로 옮겨오는 것이 아닌, 전시가 열리는 공간에 적합한 작품을 선보이는 장소 특정적 작품을 선보이시죠. 이번 전시에서도 아트선재센터 1층의 한옥에서 시작해 2층과 3층을 거쳐 옥상정원으로 이어지는 작품의 연속성과 공간감이 인상 깊었습니다. 작품을 구현하기 위해 공간을 꼼꼼히 탐구하는 데 긴 시간을 보냈을 것 같아요. 이번 아트선재센터에 맞는 작품을 구현하며 특별히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을까요?
2022년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아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어요. 5개의 방을 연결하는 <An Arrangement for 5 Rooms(다섯 개의 방을 위한 배치)>란 전시였습니다. 전시에서 여러 공간을 조금 더 구조적으로 잇는 첫 시도를 했습니다. 미술관에 가면 대부분의 작품들은 흩어져 있죠. 페인팅, 설치물,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미술관이라는 한 공간에 모여 있지만 동시에 따로따로 배치되어 있어요. 이런 모습을 관찰하며 저는 하나의 작업으로 다수의 공간을 연결하는 시도를 하고자 했습니다. 호흡이 중요해요. 하나의 호흡을 가져가는 전시를 그린 거죠.
아트선재센터의 <공간 배치 서울>전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다섯 개의 방을 위한 배치>전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동시에 아트선재센터가 가진 공간적 특성을 작업을 매개로 드러내고자 했죠. 이번 전시에서는 1층의 한옥과 옥상정원에서 보이는 서울의 풍경, 그리고 그 안에 여러 층위로 축적된 시간과 역사, 더 나아가 도시 서울을 바라보는 다채로운 시각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데 좀 더 많이 고민했습니다.
— 어린 시절 뉴질랜드로 이주해 현재 한국과 뉴질랜드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전개하고 계시죠. 두 나라에서 지낸 경험이 작품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나요?
한국은 정말 빨라요. 모든 면에서 생산적이고 효율성이 놀랍죠.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할 수가 있어요. 이 부분은 큰 장점이지만 속도를 중요시하다 보면 간혹 중간에 놓치는 게 있기도 하죠. 반대로 뉴질랜드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분위기예요. 속도는 한국에 비해 상당히 느리지만 매우 꼼꼼해요. 그렇다고 과정을 너무 중시하다 보면 시간적으로나, 예산으로 인해 힘들 수 있습니다. 성격이 전혀 다른 두 나라에서 지내며 느낀 장단점은 작업을 구상하고 실행하며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비단 속도뿐만 아니라 인구 밀도 등 두 나라의 차이에서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시간과 공간 사이의 다양한 관계성, 그로 인한 사고와 움직임의 확장 등 이러한 부분에 좀 더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거든요.
— 일상의 사물들이 전시된 점이 흥미로웠어요. 어떤 식으로 전시 사물을 선정했나요?
사물들이 갖고 있는 힘이 있어요. 아무래도 우리 일상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들인 거죠. 사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역으로 사물들을 바라보면 마치 거울처럼 사람에 대해 알려주는 무언가가 있어요. 때론 사람을 닮은 형상을 하고 있기도 하죠. 사물들을 선정하고 전시할 때는 그것의 기능이나 의미, 공간성, 물질성 그리고 몸과의 관계성을 고려해요. 이런 부분을 생각하면서 강조하기도 하고 비틀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기도 합니다. 다양한 사물을 배치하다 보면 사물끼리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마치 불협화음처럼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지는 이질감과 긴장감을 주기도 하거든요. 물론 미술관이라는 틀 안에 배치되기 때문에 시작부터 어느 정도 긴장감을 부여받죠.
— 개인적으로 미술관 구석구석 도도하게 자리 잡은 대걸레, 선풍기, 버스 하차 벨이 인상 깊었습니다.
관객들이 계단을 오르는 시점에 하차 벨을 설치한 이유는 버스에서 내린 순간 발생하는 공간의 이동, 속도의 변화 등 하차 벨에 엮인 다양한 경험과 기억을 되살리려는 의도였습니다. 사물에서 연상되는 일상의 기억이 미술관과 중첩되는 거죠. 계단은 이번 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해요. 관객들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천천히 작업을 감상하죠. 전시를 관람하는 속도에 변화를 준 거예요. 전시에 적극적으로 계단을 끌어들이며 자연스럽게 관객들이 작업을 보는 속도를 조절합니다. 이 부분을 하차 벨로 강조하고 싶었어요. 재미있기도 하고요. 그리고 벨은 작업에 소리를 쓸 수 있는 매개체(하차 벨의 삐- 소리)이기도 했는데요. 하차 벨의 명쾌한 음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까지 울려 퍼지며 평소 활용하지 않은 공간을 전시의 일부로 끌어들이죠.
— 작가님이 현재 주목하고 있는 이슈가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을 위해 만든 것들에 항상 관심을 둡니다. 일상의 사물, 주거 환경과 도시, 다양한 공간, 그리고 건축물의 하부 구조 등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주목하죠. 관찰하다 보면 사람에게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비롯해 인간의 보편적인 선호를 알 수 있어요. 이런 요소들은 사람의 행동이나 사고를 역으로 추적할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하거든요. 인간은 자신을 위해 주변 환경을 완벽히 통제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는데요.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모순에서 영감을 받고 있어요.
—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작품을 즐기는 모습 또한 기억에 남습니다. 적극적으로 한옥 내부를 누비는 분, 작품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분, 버스 하차 벨을 열심히 누르는 어린 아이들, 옥상정원에서 작품과 경관의 조화를 감상하는 분까지. 관람객이 어떤 기억을 안고 돌아가길 원하세요?
관람객이 전시에서 어떤 경험을 할 지는 예측할 수 없어요. 저 역시 생각하지 못한 관람객들의 모습을 보며 재미를 느끼죠. (웃음) 오클랜드 갤러리에서 전시했을 땐 제가 바깥에 설치한 구조물에서 두 명의 남성이 만나 마약 거래를 한 일도 있었어요. 또 다른 전시에서는 작업에 우체통을 설치했었는데요. 관람객들이 우체통에 제게 쓴 편지나 엽서를 넣기도 하고, 꽃을 두고 간 분도 있었고요. 모두 예상할 수 없었던 모습이죠. 이번 전시의 한옥에 설치된 침대에서 낮잠을 주무시는 관람객이 계시면 좋겠는데 아직 전해 들은 이야기는 없네요. (웃음)
유일하게 고집하는 부분이 있다면 저는 <공간 배치 서울>전에서 관람객이 무언가 얻기 위해 애쓰기보다 자신에게 시선을 돌렸으면 좋겠어요. 보통 전시에서 관람자는 작품을 보며 배우고 깨닫거나 외부의 새로운 정보에서 영감을 얻고자 하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이번 전시는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관람객들이 가진 형형색색 삶의 경험과 기억으로 완성되거든요.
<이요나: 공간 배치 서울>
일정 | 2024년 5월 24일 - 8월 4일
관람 시간 | 화 - 일요일 12:00 - 19:00, 월요일 휴관
장소 | 아트선재센터(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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